죄를 고백하는 문화와 명예와 체면의 문화

서구의 문화적 틀은 기독교이다. 기독교 중에서도 바울 서신서이고, 바울 서신서를 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한 어거스틴의 바울의 이해에 입각해서 만들어 졌다. 

한국인들은 그에 비해 유교, 그 중에서도 성리학이 조선 5백년을 지배했다. 1차적 무의식 층은 유교이다. 그래서 사회적 틀과 문화와 조직을 규정하는 것은 성리학이다. 

바울 신학의 핵심은 죄와 죄사함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핵심 윤리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에서 자기 중심성에 기초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개인을 내적으로 통제하는 원리의 기초는 모든 것을 아는 전지한 하나님의 존재이다. 특히나, 개신교 이후의 기독교 사회는 개인주의적 사회를 전환된다. 이 사회에서의 이기적 개인을 내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가장 강력한 장치는 결국 절대로 속일 수 없는 절대적 지혜를 가진 절대적 사랑을 가진 신의 존재였다. 

유교적 사회는 기본적으로 체면 윤리로 유교적 윤리의 실천을 강제하려 했다. 가문의 위신 체면이 최우선이었다. 개인적 불명예는 둘째치고 가문의 불명예가 더 중요했다. 그래서 공동체 내에서 비윤리적 행동을 하는 구성원에 대한 공동체 내부의 처벌은 가혹하고 집요했다. 왜냐하면 공동체 전체의 체면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에서 죄를 쉽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은 어려웠다. 왜냐하면 나만 쪽팔리면 되는 문제가 아니였다. 그리고 가문을 뛰어넘어 학파, 당파로 나누어진 구조에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심각한 정치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유교적 사회에서는 전적인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것은 처분에 맏기는 사과(apologize)를 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대신에 유감을 표명한다. 즉, 잘못한 것에 대한 감정이 있으나, 나도 이유가 있다 또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자기 합리화를 내포함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수준에서 죄악의 문제를 끝내고 문제를 대충 덮으려 한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 유교적 성선설과는 연결이 되어 있다. 즉, 나도 선의에 의해서 했는데 결과적으로 일로 인해 손해를 끼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이 있다라는 마음인 것이다. 

기독교 세계에서는 원죄를 인정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 합의가 있다. 자기를 포함한 누구나 심각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 이를 경계해야 한다. 혹 죄를 지으면 이를 감추지 말고 적극적으로 고백하고 고백한 자에 대해서는 나도 그리스도에게서 용서를 받았던 것처럼 서로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유교 세계에서는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도심은 미비하고 인심은 위태 위태하다는 말은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현실 인식은 기독교 세계와 동일하다. 즉, 잘못을 할,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매운 높은 것이 인간 상태라는 것은 인정한다. 

기독교식으로 얘기하면 죄를 짓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천연적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태 자체가 죄임을 인정하고 모두가 죄인이고 미천한 자임을 인정하는 인간 현실을 냉철하게 인정한 현실적 윤리체계를 구축하지 않았다. 즉, 모든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지 않았다.

대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맹전진해서 군자가 되어야 함을 촉구하는 윤리체계를 구축했다. 스스로 대인이고 군자라고 믿는 거대한 에고를 가진 자들을 양산했다. 즉, 이상론에 입각해서 윤리 체계를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 정체 사회 체계를 구축했다. 

이상과 현실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서 유교적 지식과 윤리의식을 장착해서 강화된 에고로 예민한 자존심을 가진 사람들이 윤리를 지킬 것을 강제하기 위해서 체면 중시 문화를 키웠다. 수치의 문화를 키운 것이다. 

인간 존재의 참담한 현실 인식 없이 사람의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유교적 윤리의식, 유교적 지식으로 인해 스스로 군자라고 여기거나 군자를 추구하는 개인들이 죄를 인정하는 순간 참회가 오는 것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에 무너진다. 에고의 수치심의 감정을 통해서 죄를 느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 수치심의 문화에서는 결사적이다. 에고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죄의 고백과 참회, 진정한 돌이킴, 그리고 용서의 프로세스가 우리 문화에서는 빈약하다. 오로지 나(ego)를 위해서 수치심을 피하려고 하는 문화에서는 나(ego) 보다 관계를 더 소중히 여기는 Apologizing이 있을 수 없다. 


성리학의 실수와 실패 (근본주의의 실패)

결국 에고의 욕심과 잔꾀가 논리에 시스템에 구멍을 낸 것이다. 먼저 기독교의 실패부터 살펴 보면 유가의 실패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초기 기독교는 사랑의 법에 따른 삶의 열매를 중시 했다. 이 삶에는 사실 내적 믿음의 요소가 먼저 있고,  내적 믿음에 따라 자연스럽게 순종을 동반한 삶으로 따르는 것이 핵심이었다.

결국 종교 엘리트가 지배하는 제도 기독교가 되면서 사랑의 삶은 엘리트를 위한 종교적 공로를 중시하는 것으로 변질 되었다. 부패한 중세 카톨릭에서 이는 구원은 인간이 공로를 세우고 구원을 구매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변질 되었다. 이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밀어 붙인 것은 당시 교황권을 주변에 있었던 부패 세력이었다. 교황에게 충성하는 것이 구원을 가능케 하는 종교적 공로가 되었다. 결국 교황은 종교적 행위, 곧 공로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서 선동하여 십자군을 조직해서 중동에서 대량 학살을 일으켰다. 

개신교는 구원을 사고 파는 참담함에 대항하기 위해서 내적인 믿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여러 세대가 흘러 이 시대의 한국 개신교는 순종 없는 삶이 없는 값싼 복음으로 변질해 버렸다. 개신교 목사의 영업질에 제자도에 따른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삶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종교 엘리트들이 먼저 타락했고, 상식에 벗어난 논리로 약한 사람들을 홀려 버린 것이다. 

자기들만 지옥에 가지 않고 순진하고 교육 받지 못한 다수 민중도 진리에 접근을 방해하고 왜곡했다. 예수 당시의 종교 기득권들자들과 다름이 없게 되어 버렸다!

이들 스스로 종교 엘리트라고 믿는 부패한 이들은 순진한 이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가이드가 되어 버렸다. 

유가는 결과적으로 실패 했다. 삶에서의 천명의 실행에 초점을 맞추고자 부실한 타락한 불교 또는 퇴락한 도교에 반발해서 유교는 철저하게 현실 세계의 인륜을 중시했다. 이러한 조건에서도 악의 트리오들, 곧 욕심과 에고의 화신들은 시스템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원칙은 기독교에서와 동일하다. 유교가 주목 받게 된 그 시대에 효과가 있었던 논리를 악용하는 것이다. 일단 인륜을 중시하는 유가가 당대에 주류가 되자, 이 논리를 극단으로 밀어 붙이면서 사익을 취한 것이다. 


과학기술이 서구에 뒤처지기 시작한 조선시대 중반 이후 백성들은 삶을 개선 시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정치, 경제, 사회, 기술적인 혁신에는 완전히 무관심 하고 예송논쟁 같은 삶과 유리된 헛짓거리만 했다. 그 시대 예송논쟁을 근대의 실용적 관점에서 보면 시간과 인재를 소모한 미친 짓이었다. 그렇게 조선을 인재를 잃고 기회를 잃어 버렸다.

유가의 실패는 유가의 실패로만 끝나지 않고, 조선의 실패가 되었다. 그리고 엇난간 성리학의 잘못된 관행은 이 민족의 제 2의 본능이 되어 민주주의를 좀 먹고 조직문화의 병폐가 되어 버렸다. 

결국 에고의 사람, 욕심의 사람이 해체 못하는 완벽한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특정 논리가 절대화 되면 그들은 거기에 붙는다. 유가의 특정 논리가 절대화 되면 또 거기에 붙어서 그들은 사익을 추구한다. 특정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면 거기에 편승하고 사람들의 삶과 상관 없이 그 논리를 사익에 위해서 이용한다.

절대적인 힘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정치권력에 의해 특정 사상과 논리를 절대화 하면 현실 세계에서 이는 절대적 힘이 된다. 그리고 그 사상, 또는 종교는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권력과 야합한 종교는 매우 위험하다. 

유가의 이상을 실행할 힘을 얻기 위해서 정도전은 정치적 힘을 추구했다. 유가의 이상에 따라 조선이 세워지자 조선은 유가의 논리를 절대화 했다. 그리고 일단 유가의 논리가 절대화 되자마자 유가의 논리가 낡은 것이 되어 버렸다. 

오히려 유가의 논리에 대항하는 불가의 힘이 남아 있었던 시기 세종, 세조 때에 유가의 개혁적 성격이 더 강해다. 그 이후는 균형을 잃어 버린 추락의 역사이다. 균형추를 스스로 차 버렸고 스스로의 생각을 우상화 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두 가지 모두를 제대로 실행하기 어려운 것처럼 한 그룹이 모두를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 사이의 균형은 필요하다.  반대 세력은 우리를 위한 또 다른 균형추이다. 

스스로를 그리고, 자기가 믿고 있다는 논리를 절대화 하지 말라. 다양성 속에 반대자가 있어야 완전해 진다. 일단 절대화 하면 절대 권력이 주어지고 그곳은 금방 환자들 악의 트리오인 악성 나르시스트, 소시오패스, 그리고 사이코패스의 놀이터가 된다. 그러면 끝이다. 

제도 종교의 구조적 문제

종교적 명분으로 사람을 모으는 것은 아주 쉽다사람이 어느 정도 모이면 세력이 생긴다.

사람이 모이면 사람들은 본능처럼 조직을 만든다. , 강자와 약자의 지배 질서를 생긴다. , 계층 구조가 만들어 진다면 계층 구조의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결국 사람들의 숫자가 야기하는 힘을 가지게 된다.

조직이 커지면, 그리고 조직의 엘리트의 숫자가 인간적 교감이 불가능할 정도 숫자가 많아진다. 조직 엘리트등의 피라밋은 거대해지고 전문 엘리트들은 그들만의 아젠다를 가질 수 밖에 없게 된다.  결국 전체의 이익과 엘리트의 이익이 충돌이 된다. , 대중 그리고 조직을 지탱하는 조직원들의 이해와 조직 지배자들의 이해가 상충되기 시작한다.

종교라도 예외는 없다. 아니, 종교가 더 심하다.

제도 종교가 문제이다. 제도 종교에는 종교 엘리트가 존재한다. 결국 이들의 이익은 종교가 생겼을 때의 근본적 가르침과 배치된다. 종교의 조직 이유와 충돌한다. 종교가 조직화 되고 전문화 되면 될 수록 하부 구성원들과의 권력 거리는 더 커지고 정서적 교감과 공감은 불가능해 진다. 


종교 엘리트의 권력은 이러한 난센스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만든다. 종교 엘리트의 권력과 이들의 이익 추구는 종교적 가르침에서 제도 종교가 완전히 이탈하게 만든다.

최종적으로 종교가 정치화 상업화 하게 된다. 그게 2000년 전 유대교의 문제였고, 이 시대 기독교의 문제이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권력과 세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하나님 나라 기독교라는 종교화 되다가 결국 제국의 제도 종교가 되어 버렸다. 제국 제도 종교는 조직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개인이 선하고 착하고, 영적이고 문제가 아니다. 조직이 되면 권력이 생기고 권력이 생기면 소외가 발생하고, 정치가 득세하게 되어 있다. 이는 법칙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운동의 초점에서 벗어나지 않는 길은 비 종교화에 있다.  교단이라는 중심을 만들지 않고 하나님 나라 운동화에 머무는 것에 있다. 종교적 엘리트가 지배하는 종교 조직으로 타락하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는 것에 있다. 영적인 존재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독점적 정치권력, 지배적 경제 권력을 비판해야 할 뿐 아니라, 스스로 배타적인 종교 권력의 울타리를 높이고 이웃과 정서적으로 멀어지게 만드는 귄위의 피라밋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 주류 기독교와 아나뱁티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충돌하는 포인트가 있다.

지배자를 위한 지배이념 제국종교의 오염

공자의 유교는 대다수를 위한 이념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지배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지배자를 중심으로 하는 고대 세계의 질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이념이다. 

성리학의 나라조선 후기의 맛이 간 성리학은 서인 노론들을 위한 지배이념이 되어 버렸다. 국왕도 민중도, 상공인도 모두 유가를 위한 딱 가리일 뿐이다. 

사회적 질서가 와해된 전국 시대에 고통 받는 민중의 삶을 안정화시키는 논리로 유가의 이념은 효용 가치가 있었는지 모른다. 

유가의 논리에 따르면 시민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꽃 피울 수도 없고, 상공인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들의 경제적 이익 보호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을 이끌기도 어렵다. 유가의 핵심 논리에서 파생된 사농공상의 우선순위에 따라 국가를 조직했다. 즉, 유가들 스스로인 선비들을 먹이 사슬의 꼭대기에 둔 것이다. 그 논리에 따라 종교화한 기득권화한 서인들은 국가 발전을 심각하게 저하고 약화 시킴으로 근대화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 조선이 맥 없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유교에 오염된 국가의 사람들인 시민이 되기 어렵다. 그들은 주체적인 시민이 되기 보다는 자기 책임을 포기하고 왕의 보호와 돌봄을 바라는 백성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유교를 포함한 종교를 가장한 지배자를 위한 이념의 독부터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원래의 메시지 부패가 개입되어 있지 않는 누룩 없는 가르침을 복원해야 한다. 

한국인들의 경우 양반들의 지배 이념이자 종교화한 유교에 오염이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틴 하이브리드인 서구 기독교의 지배이념의 독까지 더해져서 더 어려운 지경이다. 

연구에 의하면 노예를 가진 지역에서 지배자들은 노예들을 분열시키고 자유인들이 노예에게 연민을 품지 않게 하려 한다. 그 결과 대규모 노예제 산업이 지배하던 곳에서는 사람들간의 아사비아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유교에서는 말도 안되게 대부분이 소시오패스들인 왕들을 아버지로 모시라는 미친 가르침을 전한다. 그래서 왕과 스승(대부분 유가)의 패륜과 전횡, 강간질에 무력하게 당하게 만든다. 그 결과 유교 사회에서는 시민 혁명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자연스럽게 전근대 사회의 정체 속에서 서양 세력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 

그래서 서학을 연구해서 동학의 기치를 내세웠던 이들은 사람 안에 하느님이 있다는 주나라 이전의 이념을 내세웠다. 그래서 천자, 아버지로서의 왕과 스승이라는 이념적 울타리를 깨부숴 버렸다. 동학은 자긍식심 가득찬 민중을 만들었고,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는 마음이 자기 안에 있고 믿는 민중은 내면의 목소리를 믿고 혁명으로 돌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왕권주의자와 서인들의 적자인 노론세력은 외세를 끌어들여 혁명을 불길을 꺼버렸고, 스스로 깨어나버린 민중의 불길을 끌 수 없다고 판단하고 차라리 나라를 팔아 버렸다. 그리고 집권 기득권 노론세력의 대부분은 친일파가 되어 버렸다. 

한국인들은 일반 이 유교 바이러스부터 퇴치해야 하나님 나라(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내적 기반을 세울 수 있다. 그래야 이 시대에 다시 신시를 열수 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자들 역시 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민중들이 서로 연대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을 싫어한다. 본능적으로 그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대 자본주의 세계의 지배자들 역시 피지배자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질투��고, 무시하고, 경쟁하기를 원한다. 개인주의적인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하기를 원한다. 이게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승자에게도 세상은 잔혹하다. 그들 역시 가해자이자 피해자이다. 봉건주의 세상이든, 자본주의 세상이든, 국가 공산주의든 세상은 세상이다. 

민주주의와 하나님 나라 운동

민주주의 운동은 하나님 나라 운동의 흐름 중 하나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기본 목표는 계급에 의한 지배체제가 아닌 하나님의 뜻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왕의 제도를 돌이키는 일이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그 흐름과 같이 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서 왔다. 무릇 모든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 나라에 헌신한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함으로 하나님 나라 있을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 운동에 헌신함으로 이웃 사랑의 길의 정도에 서 있을 수 있다. 

예수 이후 하나님 나라 운동은 정치경제적 운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제국을 붕괴시키고, 국가를 전복하는 차원에서의 정치투쟁은 아니었다. 

개인을 존재 상태를 혁명하고, 변화된 개인들의 연대인 공동체의 삶의 양식을 본질적으로 바꾸어서 왕의 제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제자들의 의무는 세상으로부터 종속성을 벗어나기를 결정하고 변화된 이들을 위한 양의 우리를 만들고 양들을 치는 것이었다.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방식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가장 큰 장애는 제국이었다. 늘 제국은 교회 공동체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죽이려 했다. 500년 전의 아나뱁티스트를 이 땅에서 지우려고 했던 카톨릭 및 프로테스탄트 제국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계몽 시대 이후 변화가 생겼다. 민주주의 국가가 생기고 난 다음부터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한 교회 공동체를 향한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핍박은 약화되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국가는 지배자의 폭주를 통제하기 위한 법체제, 지배자들이 마음대로 조세를 겆지 못하게 하는 조세 법률주의 등을 내포하고 있다. 왕의 지배가 아니라 법의 지배를 확립하려는 노력이었다. 일반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기반한 헌법과 법의 지배는 상식의 지배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에서 공동체를 세우는 방식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대한 핍박이 현저히 줄어 들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사람들의 양심과 상식에는 하나님의 뜻이 쓰여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부분에서 먼저 진도를 나간 미국으로 대부분의 아나뱁티스트가 이주를 했다. 현대 아나뱁티스트들의 고향이 펜실베니아가 된 것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민주주의 국가가 우리가 추구하는 하나님 나라로 변화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최선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최악을 방지하는 것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힘의 불균형 상태에서는 법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힘이 불균형 상태에 있으면 힘 있는 사람들은 법을 지배하려 들 것이다. 힘 있는 사람들의 통제 아래에 있는 법은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보호하기 보다는 사회적 강자의 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이 순간 전진해야 하는 방향은 분명하다. 첫째 각성된 시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법, 곧 다양성과 자유를 존재하고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법에 의해 지배하는 국가 체제가 내재하는 절대 권력이라는 악의 폭주를 막는다. 이는 사회적 틀을 제공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한 우리들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양심적이고 자유로운 시민들을 키워내는데 공헌해야 한다. 

동시에 인간성이 꽃피는 최선의 사회를 아래로부터 만들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 교회 공동체는 초대 교회처럼 Community of Good을 지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주, 협력, 연대, 공생의 기초 사회를 하나씩 구축해 나가는 것이다. 

공동체 밖의 개인주의 사회와는 다툴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적 법률이 지배하는 세상에 개인주의적 삶의 양식으로 살던, 교회 공동체 내의 공동체적 삶의 양식으로 살던 이는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공유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환경이 개인의 권리와 인권을 보호해 주는 개인주의적 가치관에 입각한 민주사회는 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에는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공유사회는 사회와 끊임 없는 갈등을 해야 한다. 

따라서 공동체주의를 추구하는 이들은 개인주의로의 성장과 민주사회로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한다. 현 시점에서 사회적 인구의 대다수가 공동체주의에 기초한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다수가 동참 가능한 현실적 가능성이 있는 것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받아들이고 개인의 인권이 존중 받는 민주주의적 가치가 지배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의 비전은 이 너머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한 공헌을 하는 이유가 있다. 이것이 공동체주의적 가치를 실행시킬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한 사회 발전을 위한 노력을 하는 이들도 하나님 나라 운동에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 허무주의

그라쿠스 형제는 결국 살해 당했다. 순수했던 조광조도 사약을 마셔야 했다. 광해가 축출되고, 소현은 독살되고, 정조는 암살 당했다. 현실 세계에선 늘 소시어패스 그룹이 승리했다. 그들은 살인,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상주의자들은 그들의 이상주의적 가치 때문에 방법에 있어 스스로 제한할 수 밖에 없었다. 가장 폭력적이고 위력적인 무기를 제한 했다.

70년대 낭만주의 건달도 사시미 사용을 마다 않던 자들에 의해 끝나 버렸다. 주먹이 약한 것이 아니라 더 치사하지 못해서 더 야비하지 못해서 경쟁에서 밀린 것이다. 정치적 투쟁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더 악랄한 수법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이 이긴다. 결국 무자비한 경쟁이 있는 곳은 늘 소시오패스의 놀이터가 된다. 

따라서 정쟁을 통해서 이상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정쟁의 장은 사이코패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경기장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경기장을 게임의 룰을 바꾸어야 한다.

거짓에 속한 이들이 아에 들어오지 못하게 혹 침투를 하더라고 그들의 게임을 시작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도의 투명성이 요구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공동체가 그 사회이다.

반대로 현대 대도시와 정치권, 거대 기업, 각종 거대 기관, 그 중에서도 종교기관은 거짓의 사람들이 활개를 칠 수 있는 놀이터이다. 이 곳에서 가치에 헌신하는 진리의 사람들이 손발이 묶인채로 이기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즉, 승리는 매우 드물고 비 현실적인 일이 되어 버린다.

일상에서 늘 기적을 바랄 수는 없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악을 이기려 하면 결국 악한 방법에 중독될 수 밖에 없다. 악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쓸수록 악해진다. 혹 그렇게 해서 악한 세력이 물러가도 세상은 바뀌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악에 물들은 또 다른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의 운영 원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는 허무하다. 

악을 이기는 길은 단순히 악하게 살지 않는 것이다. 우리 만의 선한 길을 찾아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 악을 그들은 그렇게 살게 놔두는 것이 그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좋을 수도 있다. 먼저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의 원리에 따른 공동체로 살면 된다. 그게 모두가 이기는 길이기도 하다. 

정치는 허무한 짓이다. 시시포스의 헛된 노력과 같다. 그러나 그럼에도 허무해 보이는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필요한 만큼의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정치에 너무 과도한 기대를 걸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지도자에 대한 유토피아에 대한 비 현실적 정치적 약속과 민중의 비현실적이고 무책임한 기대는 재앙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환상적인 유토피아에 대한 약속의 명분으로 죽임을 당하거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광기의 살인자가 되었다. 


유토피아를 약속한 거의 모든 정치적 엘리트의 약속과 민중의 허망한 기대는 결국 커다른 비극과 절망적인 폭정의 야기시켰다. 역사는 보여준다. 우리는 정치를 통해서 결코 유토피아를 건설하지 못했다. 정치 권력을 통해서 이룩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비전이 거대할 수록,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이 강할 수록 과도한 정치권력 남용과 무자비하고 광범위한 폭력이 수반되었다. 정치는 허무하다. 


그러나, 풀뿌리 단계에서 이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치가 할 일이 있다. 곧 최악을 막는 것이다. 그게 정치가 할 일이고, 정치의 한계이다. 그래서 사회적 진보를 위해서는 반드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가 가장 이상적이라서가 아니다. 민주주와 함께 사회적 부가 어느 정도 이상 되어야 이상 사회 건설을 위한 풀뿌리 운동의 전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허무하다. 정치 권력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은 시시포스의 비극과 닮아 있다. 정치적 사상을 믿고, 정치적 엘리트에게 권력을 줌으로써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자기 책임을 거절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는 메시아 콤플렉스를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내 주변은 세상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는 것이다. 각자 자기 책임을 받아 들여야 한다.  

우선 먼저 내가 바뀌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는 자기 수련 및 자기 수양 운동이기도 하다.

동시에 스스로를 혁명한 이웃들 간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관계가 바꿈으로 상식과 원칙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가 일상 속으로 풀뿌리 단계에서 먼저 다가온다.  

이는 정치적 상부 구조만 바꾸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상부구조가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사회 기반체제의 변화를 야기하는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영적인 정치운동이다. 

사회 기반체제 변혁 풀뿌리 운동과 동시에 자기 책임을 받아 들이는 풀뿌리 운동이 가능하게 하는 정치 사회적 경제적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사회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서는 풀뿌리 운동을 짓밟는 정치적 과잉을 야기하는 정치 만능주의와 함께 풀뿌리 운동을 위한 사회적 환경 조성을 좌절시키는 정치적 허무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악하고 어리석은 자들 (아집과 무지)

어리석어서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악해서 어리석어 진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어리석다면 그 사람을 어리석게 만드는 악함이 무엇인지를 봐야 한다. 

모든 악은 결국 병적인 자기 사랑과 그에 따른 자기 중심성과 관련이 있다. 나르시즘과 관련이 없는 악은 없다. 

어리석게 만드는 악은 무엇인가? 자기 중심적 나르시즘이 그렇게 만든다. 자기 중심적 지성은 수 많은 관점 중의 하나이다. 악한 사람은 단 하나 자기 중심적 창으로만 세상을 관찰하고 이해한다. 

그래서 지혜를 받을 수 없다. 지혜는 자기를 떠나야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구원의 지혜는 나를 버려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적 악한 지혜는 결코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익 기반의 세상은 자기 중심적 지성을 가진 자들이 재정적인 또는 정치적 결정을 잘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의 관점이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기 중심적 사람들이 대다수이다. 거의 대부분 자기 중심적 논리로 운영되고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기적 삶의 양식은 그들 영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곧 이는 자신의 마음은 습관 곧 업이 될 것이다.

일단 이쪽으로 스노우볼이 굴러가면 쉽게 멈출 수 없다. 인가율의 법칙은 가혹하게 작동할 것이다. 수 많은 선택이 습관 또는 업이라는 스노우볼을 굴릴 것이다. 마음의 습관인 업은 곧 운명이 된다.

Quantity vs Quality in Heaven

The reason why we subconsciously think that Heaven has a capacity is due to secular capitalism or in other word money - it’s sending us this message.


Don’t be greedy. Heaven does not have any capacity, there is no limit to how many people can get in. Ones that were widely acknowledged will not be there. Many will not choose to go to Heaven, and many of us will not be privileged to enter. Heaven doesn't come with the citizen’s opinion.

If Heaven had a class system, certainly an Emperor’s after life would be in Heaven, and if what was in a scale of money millionaires would be the first to settle in Heaven

Heaven does not have capacity or a class system. It cannot be reached by simply agreeing to it, but to submit to it. To earn the heavenly life, one must be devoted to the truth and through that, one can find happiness and joy.

People with secular mind built into their lifestyle can agree that heaven does not have any monarchy. However they would subconsciously think that that heaven has a population and buildings, they would think heaven is in a form of a secular world.

To earn trust from another don't heed caution towards their words, but look into one’s lifestyle where he spends his time and money, then it becomes possible to know true self.

People who act one way yet talk another are the most dangerous. For oneself’s kingdom they will increase the population, the size of buildings and destroy the Heavens if need be.  The ones who use Heaven as the pretext of their kingdom are the children of the serpent.


One should not be so greedy, Heaven does not contain worldly goods but it has peace and joy.

Only the people with the life of heaven can gather & make Heaven together. Despite a crowd of 1000 or even 10,000 - people cannot bring Heaven to their lives if they don’t have the life of Heaven within.

Even if it is a place with only two, it can be Heaven. If they all have a life of Heaven, if they have a communion of life that is heaven.

Don't be so greedy - Heaven is not about quantity but a fruitful life.

The size of the building will not bring someone to Heaven, for a building does not have an ability to grow or to replicate.

The life of Heaven grow by its own and has a ability to replicate. Even if it is the littlest child with Heaven residing in them, his life will grow, be matured and replicate it.

Even in the smallest seed of a plant, there is life, and though Heaven seems slow it will certainly grow. One should not be so impatient towards capacity, a life of heaven does grow there.

Original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1004

A consciences shared by the 90%

In a big city society due to capitalism planted within, people such as sociopaths exist as the victors of the large city. Due to that, in big cities sociopaths tend to blend in and those who have pure hearts & learn to adapt to a wide variety of surroundings.

However even regarding all that, 90% of the population are estimated to have consciousness.

According to the philosophy of the Prisoner’s Dilemma whoever is the best cheater wins the game. While trying to aggressively deny injustice, one will easily lose themselves. These ‘heroes’ will build both communism and capitalism though, and they will be in the mercy of  life of suffering, torment and pain made by opportunists and sociopaths.

Conscience is an ugly truth, for its brings rage for injustice. While trying to aggressively deny injustice, one will easily lose their life unexpectedly. These people build in both communism and capitalism though, are forced to coexist with cheaters & liars creating a complicated system of suffering and prosperity.

If the ones with consciousness is separated from each other they will only become a pray for sociopaths. But if they gather and make a community it will become a different story.

However a city system is a society meant for society.

Restoring communities may just bring salvation to the human race.

Original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703

The State & Church

Every mainstream religion was spread throughout an empire. For Christianity it was the Roman empire, Islam for Islamic empire, for Buddhism it was India’s first unified nation the Maurya Dynasty, Ashoka’s empire.

Therefore, in order to justify the empire’s domination all mainstream religion retains a sort of logic for an oligarchical reign. For this reason independant communities became disgusted towards the institutional church.

Sovereignty has been approached as divine and sacred throughout Europe and slowly established with the spread of Christianity. The king’s system is simply wicked. The kings, nobles, and priests who have fallen for the fundamental spirit of God and Bible not only justify their plunder but call that a divine order from God. [1 Samuel 8:18]

To escape from this sort of king’s system, one must leave the mainstream church or in other words the system of plunder ruled by dogma. This may be the process of self denial.

Original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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