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중심적 지성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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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성이 같은 것이 아니다
. 성경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은 선악과를 먹으면서 열렸다. 창세기를 보면 무엇인 나를 위해 좋은 것이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선악과를 먹기를 선택함으로써 인간의 지성이 각성되었다. [Genesis 3:6] 성경에 의하면 인간 지성의 시작은 자기 중심성이었기에 인간의 지성은 자기중심적 지성이다.

그래서 상당수의 인간은 자기를 위한 위한 일에는 지혜롭고 이웃을 위한 일에는 미련하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지혜는 악한데 지혜롭고 선한데는 미련하다. 그래서 이런 지성은 서로에게 재앙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인간이 가장 재앙인 세상이 열린 것이다. 지옥문이 세상을 향해 열린 것이다. [Romans 16:19]

인간의 지성이 이쪽으로 발달한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의 관심 때문이다. 선한 일에 대해서 단순하고, 악한 일에 대해서 고도로 발달한 지적 체계를 개발시킨 것은 인간의 관심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전쟁 시스템에 인간의 모든 지혜의 결정체가 집약되어 있는 것은 인간의 어떠함을 보여준다. 

따라서 자기중싱적 지혜는 무자비하고 거짓과, 편견이 가득하다. 모두 세상을 자기를 위해 지배 조정하려는 에고의 욕망에 의해 추동 받는 지혜이다.

지혜의 소스는 하늘 또는 영으로부터 오고 세상적 지성의 소스는 자기(에고)로부터 온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는 자기중심적 지성과 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James 3:17]

많은 경우 인간이 자기 중심적 지성이 인격을 전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영적으로 위험하다. 인간 지성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 관점으로 비롯되어 자기중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사술이고 계략일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종교적 명분, 예배,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자기중심적 지성은 사악하게 이용하려 한다.

자기중심적 지성이 가장 큰 해를 끼치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하느님과 이웃과 내적 연대를 스스로 끊어 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기중심적 지성 중심의 사람들에게 초월적 차원으로에서 유입되는 영적 통찰력을 기대할 수 없다. 자꾸만 그들은 자기중심적 지성으로 영적세계로부터의 메시지를 차단하고 성령을 훼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적 지성만 단련하고 꾸미어서 하느님께 다가가려고 하는 시도는 낮은 수준의 무모하고 실패가 예정된 노력이다. 율법의 도움과 자기중심적 지성으로 무엇이 옳은 것이지 알수 있을 수도 있지만 자기중심적 지성으로는 절대로 하느님 중심적, 이타적 사랑인 선을 행할 수 있게 해주지는 못한다. [Romans 7:21, Romans 7:18

사도바울처럼 이를 오물로 여기고 버려야 하늘로부터의 지혜 곧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선을 행하는데 지혜롭고 악에 대해서는 단순해지는 지혜를 받고, 선을 행할 능력을 받는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presence-of-egocentric-knowledge

공동체와 노동가치설

&2/20/2014 4:50:19 PM

신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한 이후 아담 스미스가 설명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그러나 아담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설명을 한 맥락은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상인계급의 불의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의 지배적 경제 이념은 상인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상주의였다. 상인들은 중상주의의 논리에 따라 상업을 보호하라고 국가권력에 개입하여 권력을 조정하고 공권력을 동원했다. 그 결과 중상주의 논리로 그들 상업권력을 위한 불공정 경쟁 체제를 만들어 이익을 극대화 했다. 아담 스미스는 이들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서 공정한 경쟁을 주장했다. 자유로운 공정 경쟁을 주장하기 위해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얘기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맥락은 무시한 체 지금은 정치적 경제적 강자의 불공정 경쟁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한 논리로 보이지 않는 손이 강조된다. 예수님처럼 아담 스미스도 기득권의 수호자로 강탈되어 버렸다. 아담 스미스의 의도와 상관 없이 아담 스미스의 명성과 그의 아이디어는 여론을 통제할 수 있는 힘 있는 세력에 의해 오용되고 있다. 대자본이 자유롭게 불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신자유주의는 아담 스미스를 앞세워서 정글 자본주의 또는 해적 자본주의를 낳았다. 그 결과 자본주의 체제는 중산층을 붕괴시켜 소수 부자와 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량 생산하고 있다. 

어찌 되��건, 아담 스미스는 중상주의자도 중농주의자들도 아니었다. 바늘공장의 비유를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한 것 중의 하나는 조직된 노동력이 결국 부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신기술도 새로운 생산방식도 결국 훈련되고 조직된 노동력에 의해 결정된다. 포드이즘의 컨베이어 시스템도, 도요타의 린 생산방식도, 반도체 개발도, 인터넷 혁명도 사람, 곧 훈련된 노동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개별적 노동력이 잘 훈련되었다 하더라도 조직되지 않고서는 높은 생산력을 기대할 수 없다문제는 노동의 조직에 있다.

불행히도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스스로 조직하고 초기의 위험을 감수할 재정적 심리적 역량이 없다. 때문에 결국 조직화되고 훈련화된 노동이 창출할 수 있는 부는 노동력을 조직화 할 수 있는 자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가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개별 기술과 노동력을 가진 자들은 자본가가 조직한 회사의 부품이 되었다. 그 결과 아담 스미스가 기대한 생산성 혁명은 있었으나, 공평치 못한 부의 분배로 더 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한 사회가 되었다.

자본가들은 조직된 노동력이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이전까지 리스크를 감당할 만큼의 자금이 있다먼저 당장의 재정적 책임을 지는 대신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면 생산체제는 자본가의 몫이 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회사가 이익을 내기까지 버틸 수 있는 자본이 없는 노동가들이 기술이 있어도안목이 있어도 소용이 없다. 결과가 좋을 경우 재주는 노동가가 부리고 가치생산 체제의 소유권을 가진 자본가와의 분배의 게임에서 밀릴 수 밖에 없다. (소자본 창업의 경우 대부분의 경우 결과가 좋지 않다. 노동자는 월급이라도 챙기지만, 창업자는 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대자본이 없는 다수는 노동자의 길, 봉급쟁이 삶을 선택한다.)

유물론적 공산주의자들은 가치를 창출한 노동력에 더 많은 부가 배분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분노할 것을 가르친다. 더 나아가 자본가들의 탐욕을 미워하고 타도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계급적 이해, 곧 자본가들처럼 자기 이익에 충실해서 노동자들의 몫을 불법적으로 강탈해 가는 자본가를 타도하게 될 것을 기대한다. 이를 위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뭉치하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 개별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은 자본가가 조직한 개별 회사 내에서 파생된 조직이다. 자본가가 조직한 회사가 있고 난 다음에 파생적으로 그 회사의 노동조합이 있다. 파생조직이기에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공산주의 이상을 보고 좋아하는 자기 마음이 고상하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고, 모든 사람들을 바로잡아 주려 하고, 신랄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쓰고, 증오와 투쟁의 희생자들을 보호한다는 구실 아래 증오와 투쟁을 심어 주는 일로 일생을 허비하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불의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옳았지만, 불의를 해결하는 에너지를 불의를 만든 에너지에서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자기 파괴적인 방향으로 가기 쉬운 우울하고 안타까운 운동이었다. 그러나, 만연한 사회적 불의 앞에서도 무감각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 보다는 나아 보인다. 무책임하게 역사적 책임을 방임하지 않고 자신을 던져 사회적 불의에 저항한 이들 때문이라도 우리의 세계가 더 악화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500년전 후터라이트 공동체가 등장했을 때에 지배체제에 위협이 된 것은 후터라이트 노동자들이 중세의 농노처럼 토지를 가진 지주에 종속되지 않았고, 자본주의 시대의 자본가에게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터라이트는 공동체를 통해서 노동을 조직화 했다. 그들의 사회안에는 영주, 지주와 같은 폭력과 토지에 기반한 전통적인 지배계급도 없었다. 자본가와 같이 축적된 자본의 힘을 지렛대로 다수를 지배하고 하는 자는 그들 중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조직되어 엄청난 부를 창출했다. 영주도, 기사의 도움 없이도 그들은 자치를 했다. 자본가들의 자본 없이 노동을 조직했고, 아담 스미스가 기대한 조직화된 노동에 기초한 부를 창출했다. 초대교회 모델을 따라 모두가 더불어 잘 사회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 지속시켰다. 일부 역사가에 의하면 아나뱁티스 그룹이 한 때 구교 신교 보다 많았었다고 한다. 가혹한 박해가 아니었다면 세상을 달라 졌을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은 무장 혁명론자들이 갖고자 하는 국가폭력이라는 힘을 가지지 않고도 공산주의를 실행했다. 가진 자에 대한 증오의 에너지가 아닌 자기부인과 서로를 사랑함으로써 이상사회를 만들었다. 즉,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엘리트가 지배한 국가폭력에 의해 강제적으로 피동적으로 공산주의를 실행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영주, 지주 계급의 이익에 봉사했던 가톨릭과, 신흥 자본가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논리를 폈던 프로테스탄트 모두의 적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후터라이트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후터라이트들은 본인들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체제 경쟁에 말려들어간 것이다. 지배 엘리트들의 정치 경제적 이익과 배치될 수도 있는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 당시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리더들은 아나뱁티즘이 퍼지면 아나키즘이 유럽 전체에 퍼질 것이고, 유럽은 붕괴되고 무질서한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아나뱁티즘이 퍼지면 지주나 자본가 주도하는 지배와 종속관계라는 사회적 틀에 대중들이 복속되지 않으려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스스로 본질적으로 폭력적인 사회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거부할 것이라고 보았다. 자치라는 다른 대안이 존재하면 어떠한 댓가를 치룰지라도 반드시 이를 선택을 하려 저항하고 투쟁할 할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유럽의 지배자들은 자치적 공동체라는 대안의 존재, 당시에는 후터라이트 공동체와 같은 아나뱁티스트를 세상에서 없애려 했다. 그래서 실제로 12개 그룹 이상 되었던 아나뱁티스트 그룹 대부분은 사라졌다. (지금은 3개 그룹만 명백을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그 기억마저 지우려 했다. 이제 역사의 계절이 바뀌어 3개, 7개, 12개 이상의 자발적 아나뱁티즘 그룹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당시 지배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상상을 초월한 박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지배 엘리트들의 아나뱁트스트에 대한 적대감의 뿌리는 종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초대교회처럼 교인들처럼 이들이 배척당하고 죽은 이유는 종교적 이유가 아니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죄명은 예수님처럼 반역죄였다. 정치적 죄였다. 아나뱁티스에 대한 대학살 사태를 일으킨 드러난 명목은 종교적이었다. 더 깊은 곳에는 정치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어쩌면 내적으로는 이 동기가 더 강했을 것이라 본다. 

라카츠의 말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와 대립한다. [세상과 대립 발전하는 하나님의 나라] 어디서나 이 두 세력은 서로 싸운다.

노동가치설이 맞다. 그러나 조직화고 훈련된 노동이 창출한 가치를 노동자가 누리기 위해서 노동자가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계급인 자본가를 의지하지 않고 노동력을 조직하고 초기 리스크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연대하고 서로를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이 자발적으로 자기 몫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먼저 리스크를 지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이 노동력 조직화에 대한 비용이기도 하다. 자본가들은 그 비용을 자기가 대고 리스크를 먼저 지기 때문엔 분배에 있어서 자신들이 더 많이 가지는 것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이 두 가지 갈등이 근대 세계를 이끌어 왔다. 2012는 협동조합의 해라고 했다. 이제 피가 흥건한 근대를 마무리를 하고 협력의 시대를 열 때가 아닐까? 

공동체는 가장 오래된 협동조합 모델이며, 증명된 모델이다. 후터라이트는 500년여년 이 방식으로 살아왔다. 즉, 500여년 이상의 세월로 증명된 삶의 모델이다. 

공동체, 또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본가에만 집중된 부가 편중된에 현실에 대해서 고통스럽게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을 슬퍼하고 그에 따른 불의를 분노한다. 그러나 자본가의 부를 질투하고 미워하고 타도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구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을 불러온다. 외부를 향한 폭력은 결국 내부를 향하고 한 때 동지였던 이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이 벌어진다. 비극이다. 소련에서도, 중국에서도 킬링필드에서도 가장 최근에는 동경대에서도 이 일이 일어났다. 

먼저 자기 안의 들보를 보는 사람은 자기의 들보와 같은 죄가 악한 ��조의 기초가 되어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때문에 들보를 빼고 소박하게 서로에게 위탁하고 헌신함으로 세상이 질서를 바꾸고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일에 헌신한다고 본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communities-and-labor-theory-value

성경과 노동자의 손

&2/18/2014 9:12:01 PM 

2008년 여름 후터라이트를 처음 방문했다. 미국에서 아미쉬를 방문했을 때와 달랐다. 아미쉬는 Community of Goods까지는 가지 않았다. Partial Community라고 할 수 있다. 후터라이트는 Community of Goods을 실행하고 Full Community를 실행하고 있었다. 아나뱁티스트 그룹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그룹이었다. 아나뱁티스 그룹 중에서 가장 가혹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핍박을 받았다. 가장 최근에까지 순교자가 나왔다. 최근에 (20세기 초) 미국에서 순교자를 내고 캐나다로 이주해온 그룹이다.

이런 사전 지식 때문에 조금은 긴장되었다. 사전 지식에 의하면 이들은 급진적이고, 과격한 사람 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래 동안 그 안에 머물면서 그들을 참으로 사귀기 시작하자, 요한일서에 기술된 사귐의 실재를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저녁 늦게 퍼스트 미니스터가(목사로 이해할 수 있으나, 이들의 일이 우리가 아는 이 시대의 일반적 목사의 Job Description과 다르기에 후터라이트가 쓰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노동을 끝내고 우리와 성경 얘기를 했다. 그는 야채 밭 담당이었다. 야채 밭은 여름이 제일 바쁜 것 같다. 저녁 늦게야(때로는 새벽 0, 보통은 밤 10) 그의 일이 끝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대신에 겨울에는 일이 없다. 그래서 겨울에는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어떻게 순종할 지에 대해서 얘기하는 중에 그는 방에서 오래된 성경책을 가지고 나왔다. 그 성경을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 낡은 성경과 노동에 찌든 그의 손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낡은 성경은 조상들의 믿음을 이어온 고난을 보는 듯했고, 노동에 찌든 그의 손은 순종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치렀던 후터라이트 형제들의 처절했던 삶과 역사를 증거하는 듯 했다.

말씀을 붙들고 있는 노동에 단련된 손!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나는 자문해 보았다. 내가 무엇을 보려고 여기에 왔나? 부드러운 옷을 입을 사람이었나? 고운 손에 금박 입힌 성경을 들고 있는 사람이었나? 고학력과 도시 중산층 교인의 세련됨이 묻어 있는 사람이었나? 이들은 내가 있었던, 서울, 뉴저지, 토론토 등에 있다. 여기에 온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제자들을 보기 위해서 온 것이다.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자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先知者)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先知者)보다도 나은 자()니라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 복음에 순종함으로 회개하고 하늘나라의 질서에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 왕국 안에서 살기 위해 고난의 삶을 선택하고 거친 노동을 마다하지 그 손도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여기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 곳이다. 즉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통치를 온 삶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자들이 있는 곳이다. 여기는 도래한 하나님 나라이다. 이 나라가 성장하기를 바란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1014

고립된 초월적 경험이 아니라 성육신으로 임한 하나님의 나라

&2/17/2014 12:07:02 PM

고립적 명상은 자위 행위를 닮아 있다. 베드로의 초막은 나르시시즘적 이탈이다. [마 17:4]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홀로 즐거울 수 있는 길이 있어도 그럴 수 없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 곧 성육신의 정신을 따라 공동체적 삶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참된 기쁨은 사랑의 안에 있고, 사랑은 오직 관계성 안에서만 존재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고립적이고 분리된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부르심은 동행이다. 천상 천하 유아독존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자를 향한 부르심이다.

우리는 관계 안에서 사랑을 실행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함으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오직 자기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미친 짓을 그만 두라.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요 15:12] 사랑하는 존재를 위한 헌신으로 즐거워하라. [요 15:11] 이게 예수의 길을 따른 자의 ‘도’이다.

사랑하는 아내 또는 남편을 위한 손길, 배려의 말, 섬김을 통해 남편 또는 아내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 바른 길의 그림이다. 혼자 황홀경에 빠지는 명상적 즐거움은 건강한 기쁨이 아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주고자 한 기쁨은 자기 부인을 동반한 사랑 안에 있다.

결국 사랑의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 가야 할 길이다. 존재 자체가 다른 이의 어떠함과 상관 없이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랑을 주는 데 있어서 사적 이익과 계산이 개입되지 아니해야 한다. [마 5:46~47] 아버지처럼 사랑을 은혜로 베푸는 자체를 기쁘게 여기는 사랑의 존재가 될때에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 [마 5:45

하나님은 사랑이다. [요일 4:8] 아버지가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푼다. 그래서 선한 자에게나 악한 자에게나 비를 내리고 햇빛을 비춘다. [마 5:45]

참 사람의 참 기쁨은 사랑 안에 있다. [요일 1:4, 요 15:11]

술이 잠시 기쁨을 주고, 마약에 환락에 취하게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중독되면 건강하지 못하다. 자위적 기쁨이고, 자기만을 위한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의 생명을 얻고 풍성을 얻는 것을 보는 것으로 즐거워하는 사랑이 선하고 아름답다. [요 10:10]

영적 수련을 하는 궁극적 목적이 자기 자신의 구원과 기쁨만인 것은 건강하지 못하다. 자기를 향한 자기 사랑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경건의 훈련과 즐거움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과 같은 이웃을 향한 사랑 안에 있다. [약 1:27]

더불어 즐겁고 천국 안에 있기 위해서는 사랑의 봉사와 섬김이 뒤 따라야 한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을 위한 노동의 즐거움을 최상의 즐거움으로 본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쁨을 누리고 생명을 받고,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형제자매의 관계 안에서 형제 자매를 위한 노동과 섬김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다. 이것이 육과 에고를 거슬러서 자신을 죽은 자로 여기고 살아 있는 육체를 살아 있는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이다. [롬 12:1]

자신을 드려 사랑하는 자가 기뻐하는 것을 보는 즐기는 행복을 누려라. 이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이다. 이 진리를 충실히 따르는 자들이 모인 곳이 천국이다.

천국은 서로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서로가 종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지옥과 세상은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노예 삼고자 하는 곳이다.

천국적 삶의 방식을 내면화 한 사람들이 모이면 공동체적 삶이 형태나 나타나게 된다. 이들의 삶의 내용이 이 땅에 임해서 가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모습 중 하나이다. 

더 이상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살지 않은 사람들의 연대가 공동체이다. 자신의 필요를 위해 살지 아니하고 서로의 필요를 위해 바쳐진 삶을 사는 사람들의 연합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이며, 하나님의 나라이자 공동체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isolated-mediation-and-the-dangers

복음의 주제는?

&2/15/2014 8:52:12 PM

예수는 복음을 전하였다. 예수의 말씀은 복음이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복음, 설교 주제는 무엇일까? 신학적 해석학적 치환을 거쳐서 다수에 의해서 주장되고, 대다수가 믿고 있는, 또는 이 시대 사람들의 얘기 말고 예수의 주장을 무엇인가? 이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중 하나인 누가복음 4:43을 보면 예수의 직접적인 고백을 들을 수 있다.

[개역혼용)]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洞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福音)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NKJV] but He said to them, "I must preach the kingdom of God to the other cities also, because for this purpose I have been sent."

예수가 스스로 밝힌 증거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를 선포하기 위하여 왔다고 한다. NIV, ASV와 같은 대다수의 번역은 "하나님 왕국의 복음" 또는 "하나님 왕국에 대한 좋은 것들"로 번역 했다. 특이하게 킹제임스버전은 "하나님 나라"라고 번역을 했다. "preach"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원문은 "유앙켈리조"는 선포하다. 가져오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좋은 것을 선포하고 가져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시대 현실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고 가져오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번역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강조점이 "복음"의 실제 내용인 "하나님의 왕국"은 빠져 있고 "복음"에만 강조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다. 그리고 "복음의" 내용조차도 "하나님 왕국"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일이 없다.

사실 주류 제도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복음의 내용은 하나님 왕국이 아니다. 설교 단에서 강조되는 것은 인간의 구원의 필요성, 원죄,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 거듭남의 필요성, 등이다. 이 시대의 시대정신 부합하는 근대 교리체계에서 예수는 인류를 ransom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예수는 분명히 이와 같은 얘기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것들이 예수가 말하는 공적 메시지의 주제는 아니었다. 성경을 살펴보면 거듭남에 대해서 예수는 딱 한번 언급한다. 그것도 니고데모와 사적인 대화 중에 나왔다. 그리고 구속을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얘기는 딱 한번 나온다. 예수의 입을 통해서 구원(Salvation)이라는 말은 5~6번 정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는 예수의 메시지의 핵심 주제는 거듭남, 대속, 구원이라고 믿고 있다.

다시 성경으로 되돌아 가서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을 예수님이 언급한 것을 찾아보자. 약 100번 정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을 언급한다. 더군다나 예수님의 비유는 모두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에 대한 것들이다. 사실, 성경을 보면 어디를 가든 예수는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에 대해서 선포했다. (마 4:17, 마 4:23, 눅 9:11, 마 9:35)

예수의 의도와 목적과는 반대로,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에 대한 메시지는 완벽하게, 소위 말하는 현대 복음에서 빠져 버렸다. 무엇이 이 시대 설교 단에 주장하는 복음의 주제인가? 그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구원이다. 하나님의 왕국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예수의 초점을 벗어나게 되었을까? 어떻게 해서 예수의 강조점으로부터 벗어났을까? 거기에는 우리의 본성과 관련된 이슈도 있을 것이고 역사적, 정치적 맥락도 있다. 이를 알아야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topic-of-the-gospels

캐나다 개척 시대의 흔적

2008년 방문 때의 일이다. 어느 날 할아버지(우리 아이들과 우리들은 퍼스트 미니스터를 그렇게 부른다.)가 우리를 자기들의 엔틱들을 모아논 곳을 보여주겠다면 데리고 같다. 거기에 오래된 다리미, 장난감,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입구 쪽에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세수를 할 수 있는 세면대였는데, 접이식이었다. 나는 왜 접이식이냐고 물었다. 그 사연은 가슴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후터라이터는 칼을 쓰지 말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이었다. 이 말씀에 대한 순종은 이들을 평화운동으로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 2:4'의 말씀을 실현시키게 되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 2:4)

후터라이트는 우크라이나(러시아)를 떠난 역사가 있다. 고생 끝에 개척해서 얻은 비옥한 흑토 땅을 떠난 이유 중 하나는 전쟁에 나서라는 정부의 요구 때문이었다. 1874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고생 끝에 겨우 개척이 끝났는데, 미국 정부도 이들의 평화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 정부에 요구에 적극적으로 항의한 후터라이트 젊은이가 알카트라즈에서 죽어 나갔다.

요즘 같은 시대에 평화운동은 세련되고 그리 위험한 운동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목숨을 포함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평화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엄격하게 지킬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그 이전에 트라실베이나, 그 이전에 항가리, 그 이전에 모라비안, 그 이전의 티롤, 그 이전의 스위스에서처럼 이들은 개척한 모든 것을 버리고 캐나다로 이주했다.

첫 겨울이 힘들었다고 한다. 자그마한 집에( 40) 8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 가구를 놓을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위와 같은 접이식 세면대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2009년 여름에 방문했을 때에 젊은 친구에게 들었다. 1980년대까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80년이 되어서야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경제적 여유가 어느 정도 생겼다고 한다.

이들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감동도 있지만, 마음 한구석이 늘 아린 것을 느낀다.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치룬 대가 때문이다.

자기 번영을 위한 선택과정 중에 고생이 아니다.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한 자발적인 고난의 선택이었다. 이들은 예수님처럼 질고를 아는 자들이라 말할 수 있다. ( 53:3) 이들의 삶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남의 고난의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 1:24)

젊었을 때에 자기 몸 하나 던지는 것은 쉬워 보인다. 그러나, 막상 결혼을 하고 그나마 기득권이라도 가진 사람이 가족의 운명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믿음을 실행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사회운동을 하건, 또는 선교사로든 헌신을 했지만, 결혼 이후, 사회적 지위를 얻고 난 이후 결국 자신을 위한 삶의 길로만 되돌아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제자도의 길은 모든 것을 걸을 것을 요구하고, 모든 것을 걸어야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길이다. 근 500년간 기독교 공산사회의 삶을 살아온 후터라이트의 걸어온 자취와 존재는 비용을 먼저 계산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의 엄중함을 다시 생각나게 만든다. ( 14:28)

14: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1011-ENG

Following the Jesus-way in lifestyle

 

(미국 펜실베니아에 살고 있을 때에 Lancaster의 Amish Village를 방문한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Anabaptist를 소개하는 Visitor Center가 있었다. 거기서 찍은 사진이다.)

후터라이트, 아미쉬, 그리고 올드오더 메노나이트는 마더런 메노나이트와 같지 않다. 신학교도 없고, 외부와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후터라이트가 왜, 어떻게 해서 Full Community, Community of goods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한 내적 기초를 추적하려면 직접적인 접근을 해야만 했다. 그러한 이유로 직접 방문을 하고 사귐을 시작했다.

또한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현대화한 일부 메노나이트의 얘기들을 들으면 공산주의적 공동체를 살고 있는 후터라이트 내적 태도를 역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그 중의 하나가 이 사진의 글이라고 본다. 

분명한 것은 후터라이트이든, 메노나이트이든, 아미쉬든 아나뱁티스트는 교리나 종교적 의식을 통해서 예수를 따르는 것보다는 라이프스타일로, 존재방식, 존재양식으로 예수를 따르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하나님 나라(땅에서의)에 대한 관심과 헌신 때문이기도 하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following-the-jesus-way-in-lifestyle

사귐으로 세워지는 천국과 사역적 비전으로 파괴되는 천국의 관계

&2/10/2014 11:21:07 AM

천국은 사귐으로 시작되고 공동체는 사귐으로 세워진다. 천국은 사역적 비전의 탈을 쓴 종교적 야망 때문에도 핍박 받는다.

종교는 사역적으로 비전 또는 신념으로 시작된다. 사역적 비전 또는 신념으로 모인 사람들은 결국 사역적 비전 때문에 흩어진다. 사역적 비전이 실패했기 때문에 흩어지고, 사역적 비전이 성공했을 때에 새로운 사역적 비전이 나타나다. 자동적으로 자기가 본 이념적 비전의 실현을 위한 투쟁이 시작됨에 따라 분리가 시작된다.

이념적 비전으로 뭉친 이들 사이에서는 사귐이 일어나기 쉽지 않다. 사역적 비전이 이끄는 관계는 이념적 비전을 위한 효용성의 관점에서 사람들을 본다. 효용성이 떨어졌을 경우 관계는 멀어진다자신이 그려 놓은 그림에 부합하지 않으면 서로 배제하고 탄합한다. 

공공의 이익,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이념적 비전처럼 보였던 것은 개인적 야망으로 쉽게 변질이 되기 쉽다. 사역적 비전은 쉽게 이념적 야망이 된다.

개인적 야망이 된 이념적 비전은 우상이다. 주위의 어느 누구든 사역적 비전을 위해 헌신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종교적 또는 정치적 허울이 씌워진 사역적 또는 이념적 비전에 홀린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길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자기가 애지 중지하는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한 이용할 대상으로 보기 쉽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이런 방식으로 계몽주의적 인간은 파괴적 존재가 되기도 한다. 교만하게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 사귐이 되는 사람을 찾아 사귀고 사랑하라.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 듣기를 원할 때에 사귐의 틀안에서 서로에게 배우는 것이다.

 

사역적 비전이라 이름하는 에고의 야망이 투사하는 우상이 세워지면 결국 세상적 관계가 나타난다. 우상을 위한 제사장이자 폭군이 있고, 종교적 허울에 속은 가련한 희생자 그룹이 존재하게 된다. 무지와 아집화한 종교가 하느님의 나라를 대체했을 때에 이 일이 일어난다.

공동체를 사역적 또는 이념적 비전 차원으로 받아 들이는 이들도 있다. 공동체를 하나님의 나라라는 차원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공동체를 사역적 비전으로 받아 들이는 이들이 가장 경계하는 이들은 자기들에게 속하지 않은 공동체들이다. 다른 공동체는 경계하고 경쟁해서 복속시켜야 하며 심지어 사라져야 할 경쟁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모든 것은 에고의 놀음일 뿐이다.

공동체를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가장 반가워 하고 사랑하는 자들은 자신들과 같이 하나남 나라의 관계 곧 공동체 안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짐을 같이 지는 동역자이다. 다른 공동체 역시 하나님이 세운 나라이고 백성이며 형제로 여긴다. 즐거히 사귐을 시작한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속한 이들은 에고를 의해서 에고를 위해서 에고를 통해서 살고 일하지 않는다. 그들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heaven-based-on-love-vs-ministry

지금 여기 이웃 사이에 존재하는 천국

&1/31/2014 2:43:31 PM

천국은 과거에 없다.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있는 것이다.

 천국은 하늘 위에, 바다 끝, 산 위에, 비싼 건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그대가 천국의 주인과 함께 있는 곳, 그의 법에 순종하는 영역에만 존재할 것이다.

천국은 위대한 누군가, 아름다운 누군가, 유명한 누군가가 되거나, 그런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 그대 주변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만 천국이 있다.

천국은 지금 여기 가장 가까운 사이에서 현존할 때 접촉하고 누릴 수 있다.

과거에 명성과 실패에 사로 잡히지 말라. 천국을 잃어 버릴 것이다.

그대의 두려움이 창조하는 무서운 미래에 협박 당하지 말라. 그대의 욕심이 만들어 내는 장미 빛 미래에 현혹되지 말라. 거기에 절대로 지옥도 천국도 없다.

지금 여기, 가장 가까운 이들과 천국에 들지 못하면 그대는 영원히 지옥에 압제에 눌릴 것이다. 

지금 여기, 가장 가깝고 소중한 이들과 천국을 누려라. 그러면 영원히 천국을 누릴 것이다. 영원이란 지금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1005-ENG

하느님의 나라는 규모에 있지 않다!

&1/29/2014 10:57:51 AM

천국이 규모에 있다고 무의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세속 종교화한 자본주의 또는 돈의 메시지이다.

욕심을 부리지 말라. 천국은 물리적 규모에 있지 않다. 사람 숫자에 있지 않다. 다수가 인정하는 인지도에 있지 않다. 하느님 나라는 절대로 다수가 선택하는 길이 아니다. 천국은 국민투표로 오지 않는다. 

천국이 물리적 규모에 있다면 제국의 황제가 사는 곳이 천국일 것이다. 천국이 돈의 규모에 있다면 재벌들이 먼저 천국에 있을 것이다.

천국은 규모에 있지 않음을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으로 도달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에 있다. 천국의 생명은 진리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접촉하고 누릴 수 있다.

세상적 생각에 무의식적 삶의 방식이 점령당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천국은 규모에 있지 않다는 진리에 지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 삶으로는 절대로 동의하지 않고 반대로 산다. 이들은 무의식적으로는 천국은 사람의 숫자, 건물의 규모, 세상적 명성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대형 건물, 멤버의 숫자, 그리고 유명세에 집착을 한다.

그 사람의 믿음의 어떠함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말에 주의하지 말라. 그 사람의 삶, 시간과 돈을 어디에 투자하는 지를 보라.

생각과 가슴과 그리고 손발이 각각 안드로메다만큼 먼 위선자들은 극히 위험한 사람들이다. 자신만의 왕국을 위한 건물의 규모, 사람의 규모, 영향력의 규모 확대를 위해 다른 사람들 안의 천국을 파괴한다. 이들은 지옥 자식이다. 천국을 빙자해서 지옥을 퍼뜨리는 독사의 자녀들이다.

욕심을 부리지 말라 천국은 규모가 아니라 의와 평안과 기쁨에 있다.

천국의 생명을 가진 사람, 천국 생명의 사람이 모여야 천국을 이룰 수 있다. 천국의 생명이 없는 사람 1000명, 10,000명이 모여도 천국은 없다. 그 중심에 천국이 없으면 지옥적 에너지만 더해질 뿐이다. 사람이 많을수록 더 지옥에 가까워 진다. 

단지 두 사람이 모여 있어도 천국의 누림이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들 모두에게 천국의 생명이 있고, 사랑의 교제가 있다면 거기에 천국이 있다.

욕심을 부리지 말라. 천국은 규모가 아니라 생명에 있다.

건물의 규모가 천국을 가져오지 않는다. 건물은 죽었다. 건물은 자기 복제 능력이 없다. 스스로 자라지도 않는다.

천국의 생명은 스스로 자란다. 자기 복제 능력이 있다. 지극히 작은 어린 아이라도 그 중심에 천국이 있다면 생명의 방식으로 성장할 것이고 자기 복제를 할 것이다.

규모에 대한 욕심 때문에 젖뗀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의 천국을 파괴하는 미친 짓은 하지 말라.

에고의 허영심과 욕심을 버려라. 겨자씨 같은 작은 것이라도 거기에 생명이 있으면 천국은 느린 것 같지만 확실하게 성장한다. 결코 조바심이 내며 규모에 집착하지 말라. 거기에 천국의 생명이 없고 천국도 없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quantity-vs-quality-in-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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