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014 11:29:16 AM
후터라이트와 어울려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주류 백인 기독교인과는 공유하기 힘들었던 낯선 경험들을 하곤 했었다.
외출을 하고 다녀오면 우리 집 잔디가 때로는 이상하게 깔끔하게 깎여 있을 때도 있었다. 범인은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다. 어느 날 우리가 외출 이후 집에 돌아올 때, 잘 아는 후터라이트 친구가 잔디를 깍는 것을 발견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여럿 후터라이트 가족이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의 경험도 주목할 만 했다. 그 때 내 아내는 무척이나 바쁘게 손님 맞이 준비를 해야 했다. 한 후터라이트 가족이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그 집의 부인 되는 분이 아내에게 청소를 도와 줘도 되냐고 물었고 아내는 즐겁게 도움을 요청했다. 손님으로 초대 받은 사람이 약간은 흥분된 어조로 조심스럽게 청소를 도와줘도 되냐고 묻는 것은 낯선 경험이었다.
청소를 시작했는데, 청소 광경이 새로웠다. 보통 미국인과 캐나다인은 정리 정돈을 하고 진공 청소기로 바닥 먼지를 빨아 들이는 것으로 청소를 끝낸다. 그런데, 후터라이트 아낙네는 바닥에 무릎은 꿇고 물걸레로 마루 청소를 깔끔하게 마무리 했다. 금발의 백인 여자가 무릎을 꿇고 우리 집 마루와 화장실을 열심히 청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내게 하나의 의문이 솟아 올랐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일까? 무엇이 즐거이 잔디를 깎아주고, 집안 일을 행복하게 도와주게 만들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우리가 후터라이트 친구들을 도와 줄 때에 그들과의 대화에서 얻을 수 있었다.

가을 수확 철이 되면 농사를 짓는 후터라이트 공동체는 무척 바빠진다. 이들은 대규모 복합 농을 한다. 닭장, 돼지 축사, 소, 거위, 감자 농사, 각종 야채, 밀 농사, 옥수수 농사 이들의 농사 규모는 한국 기준으로 보면 상상을 초월한다. 수확 철에는 집중 적인 노동을 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대로 도움이 될까 싶어서 적은 숫자지만 도와주러 간다. 감자 캘 때도, 수만 마리의 닭을 잡고 정리할 때에도, 우리의 수작업이 필요할 때에는 도움을 주러 가곤 했었다. 그러면 이들이 너무 기뻐하며 환영하곤 했다.
이들과의 노동은 마음 깊은 곳을 만지고, 황홀한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 주곤 했다. 육체는 힘들었는데 내 영혼은 기뻐 춤을 추고 있었다. 아무도 게으름을 피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씻은 닭을 아이들이 걸어주면 우리는 이를 하나씩 포장을 해야 했다. 한 사람이 즐겁게 노래를 부르면 다른 이들은 화음을 넣어서 독일어로 화답을 했다.
같이 노동을 하는 한 여자분이 놀라운 고백을 했다. “우리는 너희를 위해서 노동(일)을 하고, 너희는 우리를 위해서 노동(일)을 한다. 서로를 위해서 바쳐진 삶을 살고 있다. 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가!”
이를 단서로 일이 끝난 다음에 더 깊은 이해를 위해 대화를 시작 했다. 대화 결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노동을 함을 알았다. 후터라이트에 의하면 노동을 통한 몸을 바침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이들에게 사랑은 감상도 아니고, 추상적인 교훈도 아니다. 이들에게 사랑은 구체적인 노동으로 표현된다. 자기를 살아 있는 제사로 주는 헌신으로 사랑은 표현 되었고 실천되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일을 해주고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나는 이들의 엄청난 노동 생산성의 비밀을 알아 내었고, 이러한 영성의 기초로 인해서 핍박과 추방으로 반복적인 재정적인 재난에 직면하면서 다시 일어나게 만들었던 영적인 자산을 발견했다.
그 때 안 사실이 있었다. 천국에 대한 그림이 달라진 것이다. 천국은 강가 잔디 위에서 하프 소리를 들으면서 비치 파라솔 밑은 의자에서 졸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랑함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바쳐진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노동을 통해서 자기를 드리는 곳에 천국이 있음을 알았다. 자기 자신을 살아 있는 제사로 서로를 위해서 드려진 삶을 사는 이들 사이의 교제가 있는 곳이 천국이었다.
우리 집 잔디의 비밀이 풀렸다. 그 영혼이 이미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후터라이트 형제가 있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적극적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어느 날 우리 집을 방문했는데, 우리가 없었다. 그리고 잔디가 깨끗하지 못한 것을 보고 행복한 마음으로 잔디를 깍고 돌아간 것이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잔디를 깍게 만든 것이다.
노동으로 자기를 드리게 만드는 사랑과 진리가 공동체의 기초이며 힘이었다. 여기 이 땅에 하나님 왕국, 곧 천국이 있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foreign-experience-of-heaven
&2/5/2013 2:41:09 PM
중세 자유도시 및 길드의 기초는 독립적 사법권과 상호지원이었다. [755p214Tb]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것은 법의 독립을 말한다. 즉, 자체적으로 법을 만들었음을 의미한다. 국가의 경찰 제도를 대체하는 시스템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법권의 독립의 의미는 국가를 대체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상호지원은 공동 사업을 가능하게 한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준다. 이 역시 국가의 기능을 대체한 것이다. 이러한 상호지원을 통해, 경제적 파산 다음에 오는 노예화로부터 자유로워 졌다. 즉, 상호부조를 통해서 모든 노예제에서 해방 되었다. [755p218Ct]
이렇게 해서 중세 자유도시와 길드는 국가나 관료나 경찰 제도를 통해 독점했던 모든 기능을 구현했다. [755p216Ct] 이들은 단순한 자치경영이 아니라, 국가를 대체했다. [755p219Cc] 이들은 더 이상 국가라는 정치적 형태를 더 이상 의존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755p219Bb] 그제서야 자유가 왔다.
같은 원리로 초대교회와 재침례파는 중세길드 이전에 국가 사법체제에 가서 분쟁을 해결하고 정의를 호소하지 말것을 가르친다. 대신 교회 내에서 모든 분쟁이 처리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즉, 독립적 사법권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교회가 먼저 하나님 나라 운동의 핵심 방법론으로 독립적 사법권과 상호부조를 실현함으로써 선구자, 선견자, 빛이 되었던 것이다.
콘스탄틴 이후 로마제국과 로마교회가 결혼해서 로마 카토릭을 탄생시키기 이전까지는 거의 모든 초대교회가 지킨 절대 원칙이었다. 로마카토릭 이후 제국이 하나님 나라가 되어 버렸기에 이 원칙은 지금까지 아나뱁티스트를 포함한 소수 비주류 그룹에서만 철저하게 지켜졌다.
독립적 사법권과 상호지원은 하나님 나라의 기초이다. 다만 초대교회와 재침례파가 길드와 다른 것은 하나님 나라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서 투쟁이라는 방법론을 동원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basis-of-self-jurisdiction-and-mutual-support
&3/11/2014 11:07:14 AM
90년대는 미국의 황금기였다. 클린턴 정부의 IT 권장 정책으로 미국의 IT 분야는 돈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 바람을 타고 나도 미국 IT 회사에 취직을 했다.
직장이 미국 교외 지역에 있었다. 그 지역은 한국 사람들이 많지 않은 지역이었다. 한국 장을 보거나, 비디오를 빌리기 위해서 시내에 있는 한국 가게를 들러야 했다. 그 동네 신출내기였기에 인사를 해야 했고 소개를 해야 했다. 여기서 낯선 감정들을 경험했고, 이를 이해하고 다루기 위해 고민해야만 했었다.
한국에 살았을 때는 사회적으로 비교적 균등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만 접촉할 수 있었다. 사는 동네가 그러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다른 이들의 복잡 다단한 심리를 자주 접촉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계급 상승을 추구한다. 교포 사회에서 이민 1세들의 꿈은 주류 사회에 진출하는 것이다. [Msg15] 그런데, 우리 가족은 그들이 꿈꾸는 주류 사회 진출부터 이민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그들을 비참하게 만들었고, 부러움이 있었고, 질투가 보였다.
교포사회 사람들은 흔히 못사는 흑인 동네에서 스몰 비즈니스를 시작한다. 흑인들은 보통 장사를 잘 하지 않는다. 동네가 더럽고 위험하기 때문에 백인들도 흑인 동네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것을 꺼린다. 무주공산이다. 그래서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이 들어가서 장사를 시작하면 돈을 쉽게 벌었다고 한다.
먼저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도 이 점을 알고 흑인 동네에서 비즈니스 시작해 성공한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한국인이나 유대인이나 무주공산을 알아보고, 위험을 감수해서 재정적 성공을 한 점에는 비슷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성공한 이후 성공을 누리고 관리하는 방식이 한국인들과 유대인들의 다른 점이라 한다.
성공을 하면 많은 수의 한국인들은 흑인 동네에서 부유한 백인 교외 지역으로 이사하고 낡은 차부터 바꾼다고 한다. 그리고 주급과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흑인들을 포함한 경제적 약자들이 모여 사는 곳에 자랑스럽게 BMW, 벤츠, 렉서스와 같은 고급 차를 몰고 출근한다. 이 차를 당당하게 가게 앞에 주차함으로써 자신들이 최근에 획득한 경제적 신분을 과시 하곤 했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다른 이들의 질투심과 부러움을 즐기고 자신의 상처입은 열패감을 만회한 것이다. 어찌 보면 이웃 사람들이 비참한 느낌을 들게 함으로 얻는 더러운 만족감을 즐긴 것이다. 한국인들 끼리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하던 비교 질 자랑 질 버릇이 어디 가지 않은 것이다. 한국에서 새는 박아지가 미국에서도 샌 것이다.

한국인들의 자랑 질이 시작이 되면 조만간 그 가게가 흑인 강도에 의해 털린곤 한다고 들었다. 흑인들은 자기들 동네에서 자기들 주머니를 털어서 부자가 되었음에도 흑인들과 친구가 되어 흑인 사회에 공헌을 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차부터 바꾸고 이웃인 흑인들로부터 스스로 분리 구분하고 거만하게 구는 것에 분노한다고 한다.
물론 모든 한국인들이 이렇게 저렴하게 굴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무시할 수 없는 많은 숫자의 한국들의 삶과 성공에 대한 동기가 멸시 당하지 않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것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교활한 유대인은 성공한 이후에도 장사를 처음 시작할 때에 몰던 낡은 차를 몰고 가게에 간다고 한다. 비록 집은 멀리 교외 지역으로 이사 했어도 가게에 출근 할 때에는 옷도 허름한 옷으로 갈아 입는다. 집에 있는 고급 차는 절대로 가게로 몰고 가지 않는다. 흑인들이 봐도 좌절감을 느끼지 않게끔, 그리고 유대인 가게 주인도 그들 중 하나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에 비해 일부 한국인들은 온몸으로, 태도에서, 차에서 나는 너희와 격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한다. LA 폭동은 다민족 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고 한국식으로 오만한 길로 살다가 흑인들의 사회적 분노를 자초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다행히 이제는 교포 사회는 예전보다 많이 성숙해 졌다.
한국인들끼리만 있으면 한국인들이 어떤 지에 대한 것을 잘 알지 못한다.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 문화 안의 반사회적 또는 반공동체적 요소는 이렇게 다른 문화와 비교하고 접촉할 때 더 잘 드러난다.
유대인의 경우 2,000년 전 조상의 땅을 잃어 버리고 방랑을 시작했다. 그들의 삶은 다수 이방인에 둘러 쌓여 있는 삶이었다. 유대인이 가난하던, 부자던 이는 쉬운 삶이 아니다. 가난하면 무시하고 차별 당한다. 부자이면 질투하고, 심하면 죽이거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하려 한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앞서 설명한 흑인 사회와 노골적으로 충돌하지 않은 생활의 지혜를 획득했으리라 여겨진다. 한국인의 경우 아직은 어설프다.
우리 모두 안에 자신의 성공과 번영에 대한 욕구가 있다. 그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제치고 성공한 사람들이 망했으면 좋겠다는 파괴적인 질투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성공을 즐기는 것을 보면 이들이 실패하는 것을 봐야 만족이 되는 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이를 유대인은 잘 이해하고 처신하고 있는 듯 했다.
펜실베이니아로 직장을 옮기기 전에 다른 주의 한국교회를 잠시 다닌 적이 있었다. 왜 그렇게 교회 주차장에 벤츠, BMW, 렉서스, 아큐라가 많은지! 사람들이 대충 어떤 일을 하는 지, 수입의 규모가 어떤 지를 아는 나로서는 황당한 그림 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겪는 사회적 좌절감을 교회라는 사회 속에서 보상 받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상처 받고 좌절된 그들의 심리를 이해 할 수 있었으나 건강해 보이지 않았다. 저런 식으로 보상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들의 병든 마음 상처 받은 자존심이 보였다. 이로 미루어 그들이 얼마나 비참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고서 안타까웠다.
직장 때문에 이사를 했고 펜실베니아 웨스터체스터 카운티에 살았었다. 바로 옆이 랭커스터 카운티였다. 우리는 웨스터체스터와 랭카스터 카운티 경계에 살았었다. 우리가 가는 월마트에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을 발견했었다. 이들이 아미쉬였다. 우연히 우리는 아미쉬가 자주 출몰하는 지역으로 이사를 갔던 것이다. 이렇게 아나뱁티스들과의 인연이 시작이 되었다.
아미쉬에 대한 호기심으로 아나뱁티스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결국 랭커스터 카운티에 있는 가장 오래된 메노나이트 교회 중 하나를 가게 되었다. 한국 교포 교회와 수 많은 차이가 있었다. 먼저 가장 눈에 뛴 차이는 자동차였다. 고급 차가 하나도 없었다. 반짝반짝한 최신 중형차도 없었다. 차들은 대부분은 낡고 겸손해 보였다. 사람들의 복장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고급 명품을 걸치지 않았다. 명품 전시장이었던 한국인 대형 교회의 모습과 판이한 차이였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지에 질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들이 Plain People이라는 답을 얻었다. 그들이 Plain People이라는 삶의 양식을 선택하게 한 내적 기반을 이해하자, 근본적인 차이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겸손하고 낮아지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삶의 방식으로서 그들은 Plain People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더 이상 사람들의 평가에 묶이지 않고, 노예가 되어 죽기까지 낮아진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도 낮은 사람, 겸손한 사람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그 선택의 외적 표현이 그들의 자동차였고, 옷이었다.
예배를 마치고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우리는 한참을 자기 소개를 하고 인사를 해야만 했다. 예배 후 약 30분이 지나서야 우리는 교회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외에 아무도 교회를 떠나기 위해 주창장으로 나선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의 복장과 태도에서 아무도 어린 아이처럼 자기를 알아봐 달라고 조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군집을 이루고 사는 개나 원숭이와 같은 짐승처럼 같은 집단 내의 이웃을 패배자(Underdog)로 만들어 자신의 성공과 번영을 칭찬하는 시녀와 팬클럽으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웃을 딛고 일어서서 내려다 보기 보다는 오직 위로만 향하는 야망의 길에서 내려와 다들 교회 안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서로를 안부를 궁금해 하고 겸손의 관계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돌아오는 차에서 스스로를 돌이켜 봤다. 당시 나는 고연봉 자였다. 아큐라라는 혼다 고급차 브랜드를 몰았었다. 다음에는 렉서스나, BMW로 바꾸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단순히 재정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흔한 차이기도 했기 때문에 쉽게 생각 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당연한 생각이고, 비난 받지 않은 아이디어다. 이런 생각이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부끄러운 삶의 방식임을 보았다. 이는 곧 하나님과 비기려 했던 사탄의 생각, 하나님처럼 되려 했던 아담과 하와의 생각과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메노나이트 교회를 방문하고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쪽 팔렸다.
그 이후 우리도 자발적인 아나뱁티스트가 되어서 그들처럼 스스로 Plain People이 되어 예수의 생각과 예수의 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즉, 다른 이들의 세상적 성공을 질투하지도 않고, 자신을 높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어떠함을 차나, 집, 옷, 사회적 지위, 학위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교만한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부자 코스프레를 하거나, 세상적 성공을 Show Up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처럼 Plain People이 되기를 원했다. 이렇게 해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랭카스터 메노나이트 교회 안에서 천국을 보았다. 서로가 은밀히 경쟁하고 비교하면서 서로 멸시하거나 남몰래 비참해 하지 않았다. 서로 간에 누가 잘나가지는 가지고 관계의 긴장이 없었다. 누가 더 잘 낫는지를 가지고 전쟁하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낮아지기로 결정하고, Plain People 중 하나가 됨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을 했고 서로를 사랑했다. 그러자 평화가 있었다. 거기에 천국이 있었고 참 공동체적 관계가 있었다.
&1/28/2013 1:32:53 PM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세상의 인관관계들을 모두 동맹관계 모델로 이해하도록 짜여 있다. [754.p265Bt] 그래서 우리냐 아니냐에 따라 철저 다른 잣대를 가지고 평가하고 다루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단기간에 재프로그래밍 하려는 것은 비현실적 공상주의자들의 헛된 시도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상은 훌륭하지만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계획인 것이다. 예수님도 말씀 하셨듯이 탑을 지으려면 분명히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국제공산주의자들은 노동조합 구성원들이 계급적 정체성이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을 따라 동원되어 제국주의의 앞장이가 되거나, 서로 살인을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프로그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대는 인간이 살아온 시대들에 비하면 찰라에 불과하다. 인간의 본능은 근대적 이상에 따라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석기 시대에 최적화 되어 있다고 보인다. 구석기에서는 씨족 단위의 동맹관계로 세상을 이행하는 것이 현실적었다.
그렇다면 다수에 의한 소수의 폭력을 중지시키기 위한 휴머니스트들의 꿈은 어떻게 실행이 가능한가? 일단, 인간의 이런 영적 수준을 현실로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오히려 구석기 시대적 마음에 맞게 이상사회를 재조직하면 된다. 근대적 인간도 진보적 사람도 편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편견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있다. [754.p266Cc]
계급단위도 틀렸고, 국가 단위도 틀린 것이다. 계급단위는 비현실적이고, 국가단위는 기만적이다.
원래 씨족공동체와 같은 깨어 있는 사람들의 공동체 단위로 묶어, 오히려 동맹관계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구조와 궁합이 맞게 세상을 재조직하는 것이다. 그게 공동체 운동이 현실적인 이유이다.
&2/15/2013 5:00:42 PM
이 시대에 소시오패스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가 늘고 있다. 사이코패스 보다 위험한 것이 소시오패스라 한다. 사이코패스와는 달리 이들은 사회적 환경의 산물이다. 이 시대 사회는 소시오패스를 양산하는 사회인가 보다.
소시오패스가 되기 전에 사람으로써 건강한 인간성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경계성 소시오패스가 많다는 얘기이다. 이 시대는 공감 부재의 시대이다.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려 하고 있다. 자신들의 낭비와 사치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미래에 후손에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을 대다수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를 바꾸기 위한 진지한 노력은 미비하기만 하다. [748.p11.3Bt] 공감 부재의 시대이고, 공감 부재의 인간들이 지배적인 시대이다.
후손들은 이 시대를 경계성 소시오패스의 시대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친족 공동체에 살던 남수단에서 온 소년과 같은 사람들만이 우리들의 병적인 상태를 인식할 수 있다. [748.p48.4Cb, 748.p49.2Ct] 왜냐하면 모두가 같은 병에 있다. 즉, 이웃의 고통과 기쁨에 삶에 무심하고 공감이 없는 것이 부끄럽지 않고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밖에 없는 도시인으로 살기 때문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era-of-borderline-sociopaths
&3/2/2013 11:39:19 AM
개인주의에 기반한 자본주의 거대 도시 사회에서는 양심을 가지지 않은 소시오패스 같은 부류가 승자이다. 그래서 거대 도시에서는 소시오패스 성향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런 성향이 아니었던 사람들도 환경의 영향 하에 소시오패스적 기질을 각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90% 이상은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죄수의 딜레마를 포함한 게임의 법칙에 의하면 결국 ‘배신자’ 전략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늘 이긴다. 그래서 이들만이 자손을 남길 기회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90% 이상의 사람들이 아직 양심을 가진 인류의 특질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양심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부당함에 분노를 일으키게 만든다. 그래서 부당함에 저항하게 만들다가 쉽게 비명 횡사하게 만든다. 이들이 민주주의와 같은 사회적 자본을 일으키는 사람이지만, 이들은 그 과정에서 죽거나, 다치거나, 비참한 가난의 상태에 빠지고, 소시오패스 기회주의자들은 이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자본을 누린다. 한국의 경우 거대 족벌 언론들이 민주주의와 언론의 자유라는 사회적 자본의 혜택을 누리면서 권력을 횡사하는 것과 같다.
기록된 역사에는 늘 이런 게임이었다. 양심을 가진자는 비명횡사가 운명인 것처럼 보였다.이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양심을 가진 자들이 생존하고 번영한 이유는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 볼 때에 양심을 가진 자들이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양심을 가진 자들이 개인적으로 연대하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져서 ‘배신자’들 사이에 있으면 이들은 소시오패스의 먹이감이 될 뿐이다. 그러나 이들이 연대해서 공동체를 이루면 게임이 법칙이 달라진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이 이런 소규모 공동체의 역사였기에 양심을 가진자들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 자본주의는 소시오패스를 위한 체제이다.
따라서 공동체 복원은 인류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a-consciences-shared-by-the-90
&9/18/2013 2:15:33 PM
구약은 모세의 율법으로 요약 될 수 있다. 율법의 대 강령은 두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40]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 곧 교회 공동체에게 새로운 한 개의 계명을 주셨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하나의 새 계명을 주심으로 율법을 더 완전하게 하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A new commandment I give unto you, That ye 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 that ye also love one another. [요한복음 13:34]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15:12]
구약적 관점에 의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약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갈라디아서5:14]
이 일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즉, 형제에게 한 일이 곧 예수님에게 한 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25:40]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 한다고 고백하고 주장 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에 실패한 이들,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을 거절하면서도 교회 안에 있는 자칭 신도들을 예수님이 정한신 법을 어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심판 하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3]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은 하나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처럼 제자들이 서로 형제로 받아들여서, 예수님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셨다. 곧 자신을 죽여서 친구의 생명을 살린 것이다. 자신을 죽여서 음료와 빵으로 주신 것이다.
주님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법은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 하라는 것이다. 이를 어기면 예수님이 주신 단 하나의 계명 곧 천국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5:12]
그분처럼 자기(에고와 육체적 생명)를 죽이기까지 사랑의 명령에 순종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의 계명이다. 서로 사랑하는 이 관계가 하나님의 나라이고 공동체의 실체이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한복음 15:13]
예수님이 주신 단 하나의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법을 지키고 실천하지 않고 주여 주여 하면서 종교적인 실행에만 열중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들은 천국의 법을 어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주신 하나님 나라의 법을 어겼기 거기에 따라 심판이 임할 것이다.
양과 염소는 구분될 것이다. [마태복음 25:31-40] 곧 사랑을 실천한 양과 서로 사랑하기를 거부하고 자기 구원만을 위해 자기를 높이고 종교적 외식과 자기를 위한 영성에만 열중한 염소를 가르고 심판을 하실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지 않고서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일이다. 성령을 거역하고 수 많은 사람들을 실족케 하는 짓이다.
이는 부자들과 기득권에 입 맛에 따라 만들어진 거짓 복음이다. 이기적인 내가복음에 의지하는 것은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종교적 외식을 벗어나야 한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 자기(에고)를 비우고 낮추어 서로 종이 되어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길로 가야 한다. 자기를 비우고 낮추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을 거절하고 종교적 외식과 종교적 지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들을 예수님은 저주 하셨다. 이들 외식하는 자들은 자기만 지옥의 길(자기를 채우고 높이는 길)에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길(자기를 비우고 종이 되는 길)을 가고자 하는 자들도 막고 그들을 더한 지옥 자식(자기를 높이려는 자들)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1-15]
불행히도 공적인 기독교는 소유문제와 폭력문제에 실패했다. 역사의 고비마다 하나님 나라의 샘으로부터 언제나 새로운 도전과 충격이 이 세계 안으로 들어 왔으나, 공적인 교회에 의해 철저히 거부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공적인 교회와 대립하게 되었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one-commandment-of-jesus
자유도시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굶주리는 사람이 없었다. [755p223Tc] 자유도시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에게 균등하게 필요한 음식과 주거를 제공해주는 것이 근본원칙이었기 때문이다. [755p222Tb] 이를 위해서 모든 시민들이 사용할 식료품은 도시 자체에서 구매했다.
따라서 자유도시 내에서 식료품 거래를 통해서 독점적 상업적 거래를 하는 것은 제한 되었다. [755p223Bt] 모든 곡물 교역은 자유도시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렇게 시가 구입한 곡물을 원가에 공급하기도 했다. [755p224Tb] 또는 시장원리에 따라 시민에게 판매하는 일은 없었다. 대신에 ‘사려 깊은 사람’에게 맡긴다. 반 시장적, 휴머니즘적 원칙이 지켜졌다. [755p225Ct]
그것이 자본가들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는 바뀌었다. 자본가들의 상업적 이익을 위해서 도시 안의 사람들의 굶어 죽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지금은 곡물 사유재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거래 이익이 사람의 생존권보다 우선시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esttest
&1/29/2013 11:10:20 AM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는 가치 기준은 공동체의 이익이었다. [755p147] 그러던 것이 에고가 발견되고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가치 기준이 에고로 바뀌었다.
현대 인간은 에고에 이로운지 해로운지에 따라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헌신하고 사랑해야 할 공동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에고가 자리를 잡았다.
현대는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의 공동체마저도 거의 해체되었다. 현대 도시 개인주의 사회에서의 유일한 가치 기준은 이제 개인이 되어 버렸다. 이기적이고 야심 가득한 개인간의 범죄, 기만, 충돌이 이 시대의 주요 갈등 요인이다.
개인이라는 자기 중심적 가치 기준을 바꾸지 않고서는 평화는 없다. 신약의 하나님 왕국 운동은 공동체 기준 가치의 회복 운동이기도 하다. 에고를 초월해서 더 이상 나를 위해서만 헌신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형제애의 삶을 서로에게 헌신하는 사는 삶을 배우고 실행했다.
콘스탄틴 이후로 그 중심에 도그마, 또는 사적 구원을 위한 비법인 교리가 신앙의 중심이 되어 버렸다. 도그마는 이론화한 에고이다. 즉, 종교화 되어 버린다 것이다. 그 결과 종교적 기만과 반동이 뒤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도의 자리에 신학적 해석을 제공하는 사제들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정작 그리스도는 예수를 사랑하는 길은 공동체 내에서 가장 작은 자를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종교는 이 모든 말씀을 무시하고 제도 교회와 사제에 대한 충성으로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 예수를 배신했다. 종교적 헌신과 하느님 나라에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었던 사제 계급에 대한 충성을 강조했다. 최종적으로 예수의 자리에 콘스탄틴과 그 후예들이 앉아 버렸다.
사람들은 다시 길을 잃어 버렸다. 개인 에고가 아닌, 종교 에고, 제국 에고에 헌신하게 되었다. 종교적 에고는 더욱더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어서 제국주의 치닫게 했다. 서구 제국주의는 이를 제국주의 시스템의 운영 에너지로 삼았다. 상황은 더 나빠졌다.
서구 기독교 역사는 오랜 거짓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의 시대였던 것 같다. 에고의 시대는 여전히 진회되어 지속되고 있다. 에고의 시대 이후 내면적 삶의 질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어 내면은 거의 지옥이 되어 버렸다.
인류가 이런 대가를 치러서까지 영적 여정을 하는 이유는 씨족 사이의 잔인성을 극복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서 먼저 각자 개인을 발견해야 서로 씨족 단위의 부분으로 보지 않고 개인으로보고 공통점을 발견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인종주의, 지역감정 등을 통해서 내집단과 외집단에 대한 이중적 도덕 기준의 사악성은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우리 모두, 우리 모두의 연약함과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을 주고 받고 있다.
아직 대다수 인류는 이중적 윤리개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원시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 과정을 거쳐 다시 공동체주의로 성장한 북유럽 국가의 사람들중 일부만 이중적 윤리 기준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신석기 이후 씨족 단위의 결속력은 붕괴되고 국가 단위의 결속력이 되어 왔었다. 근대 이후 국가 단위를 뛰어넘은 결속과 연대를 이루어졌지만, 동시에 가족 내의 연대와 결속력이 줄어 들고 있다.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것이라는 예언이 실행되어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가족 이기주의 시대도 끝나가고 있다.
부족적 연대가 와해 되었듯이 국가적 연대가 붕괴 위기에 있는지도 모든다. 긍정적으로 보면 국가 이기주의 시대, 또는 국가를 기준으로 하는 이중적 잣대 기준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창세기는 선악과는 에고를 기준으로 가치판단을 하는 개인의 출현과 그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적인 부를 축적함으로서 씨족 사이의 통일성과 안정성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755p149]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가족은 최초의 존속 살인의 역사를 시작한다. 반역과 살인과 피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644-ENG
&2/5/2013 12:34:43 PM
모든 주류 종교는 제국의 종교가 됨으로써 주류 종교가 되어 버렸다. 기독교에는 로마제국이 있었다. 이슬람에는 이슬람 제국이 있었다. 불교는 인도 최초 통일 국가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제국이 있었다. 그리고 유교를 위해서는 한제국이 있었다. 예외가 없다.
따라서 모든 주류 제도 종교는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 하는 논리를 개발했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핵심 가르침을 삶의 방식으로 표현한 공동체를 가장 혐오한 그룹은 제도교회의 기득권 그룹일 수 밖에 없었다. [755p218]
왕권이 신성하다는 개념은 기독교가 유럽에 전파되고 나서야 서서히 확립되기 시작했다. 왕의 제도를 근본적으로 악하다고 판단하는 하나님과 성경의 기본 정신에 [1 Samuel 8:18] 반해서 기독교 사제들은 왕과 귀족의 약탈을 정당화 했을 뿐만 아니라 신성시 했다. [755p200]
따라서 왕의 제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주류 교회 다시 말해 제국의 약탈 논리를 지지한 도그마를 떠나야 한다. 이 과정은 자기 부정의 과정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state-and-chur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