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온유함으로 누리는 하느님 나라의 실재

&5/16/2013 10:13:46 AM

온유함이 없기 때문에 작업 중에 마음에 고통이 있는 것이다. 내면에 거칠고 날카로운 마음이 스스로를 베는 것이다.

아담의 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눈 앞에 지식이라는 형태로 선악과가 보이면 욕심이 일어난다. 마음은 메마르고 거칠어 진다. 그 결과 영적 호흡이 끊어져 버린다. [Msg826/아담의 사과스스로 자기 마음을 압박하고 고통스럽게 하면서까지 그 열매를 따려고 한다. 시스템2는 긴장과 욕심 모드로 전환이 된다.

온유란 많은 것이다. 온유란 여유이다. 온유란 초월이다. 온유란 무상함을 아는 지혜이다. 온유란 자비와 사랑이다. 넘치는 내적 은혜이다. 온유라 자족과 만족이다. 온유란 그냥 현재 이 상태 그대로 만으로도 감사하고 받아 들이는 충만감이다.

온유란 내면에 충만한 평화의 외적 표현이다. 더 이상의 재리의 유혹과 염려도 없고, 내적 흔들림도 없는 평안의 상태에 도달했을 때에 오는 마음이다. 드디어 쉼(순수 의식/ 안식)을 얻은 마음 안에 깃드는 것이 온유이다. [Matthew 11:29]

온유란 언제나 겸손과 함께 온다.

온유란 성숙한 영혼의 내면에 일어나는 존재의 기쁨이다. 

온유함으로 운전하고, 온유함으로 연구를 하고, 온유함으로 일을 하라. 온유한 마음이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이다. 딱딱하지 않고 부드럽고 촉촉하게 적당히 젖어 있는 마음이 곧 온유한 마음이다. 생명의 말씀이 풍성히 자랄 여유가 있는 정리되고, 영양 많고 깊은 마음이다.

무엇을 하기 이전에 먼저 온유한 마음부터 얻어라, 그러면 쉬지 말고 기도하며 생명의 말씀을 키우는 것과 받은 달란트를 최대한 남기는 일을 하기 위한 비범한 노력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해 준다.

행복해라. 그대가 행복하지 않으면 그대가 있는 그 곳이 행복할 수 없다. 그대가 존재 자체로 행복하지 못하면 아무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외적 소유와 세상적 성취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행복할 수 있는 길 중에 하나가 온유이다.

마음이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땅을 유업을 받을 것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enjoying-the-kingdom-of-god-with-gentleness

고대 노예제처럼 현대 시간제 노예제도는 사회적 자본을 파괴하나?

&6/12/2013 2:11:25 PM

노예제는 사회적 자본을 파괴하도록 설계된 사회제도이다. [1] 그렇다면 노예제처럼 현대 종업원 제도도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일까? 만약에 노예제 수혜자들이 했던 일을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가들이 같은 일을 한다면 그러하다.

미국에서나 로마에서나 노예나 소작농의 사회적 결속력을 파괴하는 것에 대주주의 우선적 관심이 있었다. 또한 노예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그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도록 하는 프라파간다로 자유인들을 교육했다. [2]

질문은 이것이다. 현대 자본가들이 종업원들끼리 사회적 결속을 파괴하고, 연대하지 못하게, 때로 착취 당하거나, 부당하게 노동력을 이용 당하는 이들에게 공감하지 못하도록 시민들을 교육시키는가? 답을 그렇다이다. 

따라서 같은 방식으로 자본주의 세계는 점점 사회적 결속력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스스로 내부붕괴로 자기 파괴적 행동을 할 것이다.

 미국에서의 경험을 보면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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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국의 탄생, p412

[2] 제국의 탄생, p426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802-ENG

 

이방 나라와 같이

&7/28/2013 7:23:45 PM | 1 Samuel 8:5, 1 Samuel 8:3

결국 사람의 문제이다. 사무엘 때까지 잘 기능했던 것이 사무엘 이후로 중단되었다. 하느님이 주신 제도도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으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 이 경우 새로운 사람을 구했어야 했다. 사람이 준비되지 않는 이상 어떤 제도도, 정책도 문제가 발생한다.

제도의 차이는 사람이 문제가 생겼을 경우 최악으로 어디까지 나빠지는 지를 보고 알 수 있다. 왕의 제도와 거기에 따른 강자 중심 지배 체제와 경제 시스템은 공동체의 근본적 붕괴를 이끌고, 빈부 격차를 극한까지 밀고 나간다. 그리고 일단 이 제도가 들어온 다음에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비 가역적이다.

이들은 하느님이 주신 하느님 나라의 삶의 방식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우리들의 악함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 나라의 시스템에 대한 거부를 할 수 있는 핑계를 삼았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 체제를 거부하고, 왕의 체제, 이방 나라 체제를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에 도입하기를 요구했다.

이들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제도를 거부했다. 기득권이자 대다수 부자였던 장로들이 나서서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장로들에게는 하느님이 만들어 놓은 제도, 큰자가 작은자를 섬기는 제도가 불편했을 것이다. [1 Samuel 8:4]

결국 이들은 하느님의 리더쉽이 관통할 수 있는 체제를 버리고, 인간의 욕심과 아집을 관철하기 쉬운 제도를 선택함으로써 하느님을 버렸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as-the-gentile-nation

왕국복음과 하나님 자녀들의 일어남

&7/28/2013 9:51:03 AM

오래 전에 왕의 제도가 들어왔다. 즉, 자치적 공동체에 반하는 강자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공동체는 폭력에 의해 해체 되었고, 사람들은 왕의 도시에 던져 졌다. 왕의 도시에 들어간 자들은 도시 주도의 착치 지배 체제의 부품이 된다.

이 구조에서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 그 결과 모두 착취 체제의 더 높은 곳에 올라 가려는 경쟁을 한다. 일단 아래에 놓이면 존중 당하지 않는다. 의견은 무시 당하고, 그들의 생각과 감정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이런 체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체제에 적합한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왕의 제도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재 생산해 내기도 한다.

하나님의 왕국 복음이란, 이제 왕의 제도 곧 큰자가 작은 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제도가 끝난다다는 뜻이다. 큰자가 작은 자를 섬기는 제도가 그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주인의식, 주권 의식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사람에게 지배 받는 것은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가 지배하는 자치적인 정치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에 있다. 이 비전의 구체적인 실체는 공동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왕으로 삼는 길이기 때문이다. [삼상 8:7]

이게 가능하려면 그 안에 하나님이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임이 있어야 한다. 그들 끼리는 가치적 차원에서 위 아래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들 안에 하느님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안에 하느님이 존재하는 이들은 한정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지는 않는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820-ENG

왜 후터리안만이 거기까지 갔나?

&080829124520

Strict Biblicism 때문이다. [1] 다수 개신교도보다 소수 Anabaptist가 성경적용에 있어서 엄격하다. 그 Anabaptist 중에서도 Hutterites가 사적 소유욕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지키는 것에 더 엄격한 면이 있다.

부자 청년의 비유를[마태 19:16~22] 통해 부자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함을 설명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에 나와 있다. 하지만 이를 있는 그대로 왜곡 없이 전달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더 나아가 이를 실제로 지키는 교회는 거의 없다. 설교자도 이 주제는 피하고, 듣는 자도 이 얘기는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아가 거부하는 주제는 모두 피하고 무시하고 예수님의 엄중한 말씀이 마치 성경에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게 주류를 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주류 제도 종교의 게임의 룰이다.

후터리안은 성경, 특히 복음서의 주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들었다. 말씀을 받기 어려워서 다시 자아의 요구와 기대로 돌아서지 않았다. 

같은 이유로 사유재산에 대한 예수님의 직접적이고 분명한 가르침으로부터 도망가려 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들은 초대 교회만 실행 가능했던 기독교 공산주의적 삶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예수님 당시의 부자와 이 시대의 부자들이 재물 때문에 근심하여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가는 길에 돌이킨다면 등에 실려 있는 재물에 걸려서 바늘귀 문을 통과 못한 낙타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도 낙타가 바늘귀 문을 통과하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고 하셨다. [마태 19:24] 낙타는 그래도 등에 진 짊을 내려 놓고 무릎을 꿇리면 바늘문을 통과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등에 짊어 진 짊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낙타와 달리 부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부자 청년처럼 짊어진 재산을 내려 놓기가 거의 불가능 하다. 그들이 삶은 사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지키기 헌신되었고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바쳐져 있다.

부자들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너무나 잘 적응하고 성공했다. 낙타와 달리 그들이 보기에는 가지고 있는 자산은 영혼의 짊이 아니라 이땅에서 육체적 삶을 유지시켜주는 반석이고, 산성이고, 생명줄로 여기지기 쉽다. 그래서 그들은 명백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부자로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에 가고 싶어하는 욕망에 사로 잡히기 쉽다.  

자신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많은 재산이 주는 사회적 지위와 안정감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심지어 재산을 짊어 진체 바늘귀를 통과 할 수 있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까지 한다. 더 나아가 그들의 바램에 따라 거짓된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을 두기를 좋아하고 예수님의 명백한 말씀을 거역하려 하는 유혹에 잘 빠지기 쉽다. 심지어 예수님을 말씀을 순종하는 자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훼방하고 핍박하는 지리까지 가기도 한다.

 

이에 비해 가난한 사람들은 오히려 얼마 안되는 재산을 쉽게 버릴 수 있어서 더 쉽게 하나님 나라의 삶의 양식으로 들어올 수 있다. 곧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를 위해 헌신된 하나님 나라 공동체에 즐거히 들어온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를 얻는 것은 좋은 거래인 것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 13:44~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에서부터 지금까지 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부자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오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없는 묶여 있는 짊이 있다. 재산의 짊이 무거울 수록 집착도 더 강하다.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나 명백해 보이는 하늘 나라를 얻는 거래가 남는 거래라는 것을 받아 들이는데 더 많은 이해와 깨달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근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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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Strict Biblicism: The Hutterites, however, in their strict Biblicism, became extremely sensitive and alert to the pitfalls of “mammon” in all its form.

“As the beetle lives in the dung. And the worm in the wood, so avarice (or greed) has its dwelling place in private property.” (1599) Whosoever refuses communal living, they taught, shows obvious sympathy for avarice (or greed).

 And then they quote the example of the rich young man in the parable who could not enter the Kingdom of God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sell all that he had and give it to the poor. [마태 19:16~22]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why-was-it-only-the-hutterites-who-went-that-far

사유욕의 제거로 시작되는 공동체 삶의 질서

#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소유에 대한 탐심을 꺽음으로 시작되는 하늘나라의 삶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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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통제하기 쉬운 환경과 삶의 질서가 있다. 즉, 사적 재산에 대한 욕망 또는 그 정당성을 자발적으로 부인하는 공동체적 환경이다. 

모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기만 잡을 것이 아니라 먼저 웅덩이를 제거해야 한다. [딤전 6:6-10] 왜냐하면 웅덩이에서 새로운 모기들 계속해서 산출되기 때문이다. 이기적 욕망과 이기적 욕망이 야기하는 파괴적 악행을 없애려면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재산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1] 

죄와 싸우려 하지 말라. 아에 시선도 두지 말고 보지를 말아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죄의 욕구와 논쟁하려는 순간 죄의 영향력에 빨려 들어간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가 섬기는 맘몬을 부수는 길은 사유재산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 19:16~22] 그렇게 해야 참된 삶을 파괴하는 사유재산과 함께 사적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적 의라는 차원에서 완벽해 보였던 부자 청년은 완벽하고 의로와 보였다. 스스로 여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사유 재산 포기의 요구는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다른 종교적 요구는 사랑 없이 자기 부인 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자기를 위해서 자아 충족적으로 종교적, 윤리적 차원을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위신과 부자 청년 육체적 삶만을 담보해 주었던 부자 청년만을 위해 봉사해온 사유 재산의 포기에 대한 요구는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에 잡혀 있는 그의 중심을 보여 주었다. 자기 부인을 동반한 사랑 없이 자기 의와 자랑, 자신을 위해서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율법 실행의 내적 동기를 보여주었다. 

당시 부자 청년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시대 제1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도 오로지 먼저 나 자신만을 위해 봉사하는 사유 재산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큰 시험거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 땅에서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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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Strict Biblicism: The Hutterites, however, in their strict Biblicism, became extremely sensitive and alert to the pitfalls of “mammon” in all its form.

“As the beetle lives in the dung. And the worm in the wood, so avarice (or greed) has its dwelling place in private property.” (1599) Whosoever refuses communal living, they taught, shows obvious sympathy for avarice (or greed).

And then they quote the example of the rich young man in the parable who could not enter the Kingdom of God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sell all that he had and give it to the poor. [마태 19:16~22]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23-ENG

십자가를 둔 싸움, 하나님 나라와 바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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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들, 또는 세련된 이기주의자들은 십자가를 볼 때 거기서 사적 안식과 위로만을 찾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우선적 관심이 이생에서의 복, 사적 구원과 행복, 영생 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웃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자기 희생이라는 십자가의 원칙을 통해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질서에 복종시키고,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복종시키기 위해서 십자가 앞에 나아간다. 

본질적으로 기관으로서의 제도 기독교는 현실 안주주의적이다. 그래서 이들은 본능적으로 영적 영역과 세상적 영역을 구분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자기 희생 없이 안락한 영적 현실 안에서 도피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구지 타락한 세상에 성육신 해서 온갖 오물을 뒤집어 쓰고 고통을 관통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현실안주주의적인 행복을 위해 이해하고 싶어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할만한 만만한 자들이다. 

하나님 나라를 믿는 교회 공동체는 역동적이다. 세상에 대해서 위협적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과 세상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하나님이 개입하셨고, 그리스도가 오셨기에 하늘 나라와 이 세계는 분리될 수 없다. 하늘 나라의 질서에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이미 왔고 그의 나라가 확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목숨을 포함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기꺼이 대가로 지불함으로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자를 찾고 부르고 제자로 세우신다. 하나님 나라의 돌파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모세가 이집트 왕자의 신분을 버렸다. 그리스도의 이후의 수 많은 제자들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처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 나라를 오게 하기 위해 투자했다. 이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다. [Hebrews 11:38]

그리고 세상은 이들이 살기에 합당한 장소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궁중에도, 좋은 집에도 있지 않는다. 이들은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 거하 기도 한다. [Matthew 11:7 ~ Matthew 11:9] 때로 세례 요한 때에 엣세네파가 그렇게 한 것처럼, 선지자들이 그렇게 한 것처럼 이들은 세상과의 대립, 긴장 때문에 분리되어 광야에 거한다. 역동적인 이들의 믿음과 운동이 이들을 광야로 몬 것이다. [Hebrews 11:38]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fight-to-put-up-the-cross-babylon-and-the-kingdom-of-god

Lead to Community of Go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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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터라이트! 이들은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뛰어 넘었다. 500년 가까히 서로 사랑하는 말씀을 Community of Goods을 실천하는 수준까지 적용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위탁되고 헌신된 삶을 방식, 존재 양식을 선택했다.

진정 사랑하는 남녀가 부부가 자기 것에 대한 구별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마찬 가지로 이들은 예수의 사랑에 의지해 형제 자매를 진정 사랑함으로 형제에 대해서 재산권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생겨남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회가 인류사회에 다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내적 토대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길[1]이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따랐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산사회가 또는 Community of Goods이 탄생된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 당해 먹히지 않은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길을 열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자들이다. 이런식으로 사랑을 선택한 자들만이 이 천국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쫓아야 한다. 그 시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와 자기 돌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나만을 위한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를 포기한 바로미터는 사유재산의 포기이다.

다른 크리스챤, 심지어 다른 Anabaptist들이 기독교 공산사회를 산출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적인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고 날마다의 자기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는 데까지 헌신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모르는 인간의 삶의 욕망 자체가 재앙의 씨앗이다. 자신 만을 위한 삶의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아를 죽음에 던져서 친구를 위한 사랑을 실천함 [요 15:13] 으로 사적인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한다. 그 결과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고, 이들의 교제가 발전해서 기독교 공산사회가 된다.

진정한 Gelassenheit가 있으면 욕망의 포기가 있다. [2] 진정한 욕망의 포기는 사유재산 포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물질 공동 소유의 공동체, 공산 사회로 이끈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또는 지식이 공산사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죽음을 통한 사랑의 헌신이 Community of Goods을 창출한 것이다. 

무신론적 국가 공산주의가 실패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오히려 국가 공산주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생겨난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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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Elsewhere we read, “If you want to become a disciple  you must resign to such a Gelassenheit and must renounce all private property.” 

At this place it might be good to stress that this attitude leads to the establishment of complete community of goods, while other Anabaptist groups, likewise intent on practicing love, were satisfied with a “community of charity,” a caring for the needy without the demand of giving up private property altogether. Such a community of charity was typical among the Swiss and Dutch Bretheren. 

 [2] Hutterite Studies p84: Avarice, the demon of possession, must therefore be overcome if true Gelassenheit is to be achieved. But once it has been overcome, there follows complete community of goods in brotherly togetherness and sharing.

 # Galassenheit is a German word that doesn’t have a direct English translation. The best definition I could find was in the book Amish Grace: How Forgiveness Transcended Tragedy - Kraybill, Nolt, and Weaver-Zerche. The authors define galassenheit as the attitude of yieldedness or submission to the will of God. It is lived out through yielding to one another, renouncing self defence and giving up the desire for justification or efforts at revenge.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883-ENG

내적 마성의 두려움

[Msg15] 

강자와 약자 (폴 트루니에) p94에서

우리 속에 두려움을 불어넣는 내면의 힘은 바로 삶 자체이다. 이것은 성적인 욕망만이 아니라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1]이다.

우리 중에서 어린 시절부터 가장 강한 사람이 되고, 가장 부자가 되고 가장 큰 사람이 되는 것을 꿈꾸지[2]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들을 짓밟지 않고,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고, 우리의 도덕적 양심인 질서 의식을 거스르지 않고서는 그러한 꿈들을 이룰 수 없다고 느낀.[3]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을 두려워하고, 욕망에 굴복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우리 자신을 두려워한다.

 


[1] 우리 삶의 욕망 자체가 마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아직 더불어 번영 하며 사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중 다수가 자기 살기 위해서는 남을 밟아야 한다고 믿고, 실행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이 우리는 두려운 것이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욕망 자체가 재앙이다.

[2] 생존을 위한 일용할 필요를 넘어선 것을  바라는 이 마음이 교만이고, 이것이 욕망이다. 사탄이 하나님과 비교해서 여기에 넘어졌고, 아담도 하나님과 비교를 해서 여기에 무너져서 사탄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 가인은 이 꿈 때문에 아벨을 핍박했고, 죽였다. 전통 동화의 어머니는 이 꿈과 삶의 압박 때문에 호랑이가 되었다.

[3] 이런 이유 때문에도 사람들은 부자들은 본능적으로 악하다고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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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자료

Msg1017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fear-of-inner-abrasiveness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Msg552] &11/1/2011 7:22:54

예수님을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명백하다. 현재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으라는 것이다.

여기에 온건주의자인 자칭 그리스도인과 예수님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믿고 주장하는 주류 기독교인들은 온건주의자들다. 그래서 주류 기독교인들은 삶의 방식을 지키고자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를 적당한 마사지를 거쳐서 전달되게 만들거나, 의도적으로 다수의 인식에서 배제시켜왔다.

주류 기독교인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명백히 극단주의자다. 예수님은 적당한 체면치례만으로 넘어가려는 대다수의 바램을 간단히 밟아 버리셨다. [ 19:18~22]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의 기반을 부셔 버리고 새로운 기초 위에 다시 세울 것을 요구하신다. , 다시 태어나는 수준의 변화가 아니면 그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셨다.

주류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린 오직 온건한 방식, 충격적이지 않은 방식의 변화만 받아들일 수 있고, 필요할 뿐이다. 그렇다! 주류 기독교도의 대변인인 칼빈의 주장대로 우린 완벽하지 않다. 맞다 우린 모두 죄인일 뿐이다. 그래서 우린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사랑의 화신인 하나님은 우리 용서하실 것이다! 얼마나 사악한 논리인가? 그들은 예수님 화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분은 단지 과장법의 대가였을 뿐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적절히 튜닝하고 양심의 저항을 무력화 시켰다. 예를 들어 이런식이다.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절하라!, 매달 구제비로 $1000 정도를 지불하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자원 봉사에 참여하라! 대충 이 정도 수준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고 지키면서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규정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수준 이상의 것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노예가 되라고 하셨다. 선한 사마리안인처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도 되지 못한다고 하셨다. [ 10:36] 그런데 어떻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절한 정도의 사랑의 실천만으로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친절은 죄인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도 더 잘 실행을 한다. [ 5:47]

주류 기독교도들 사이에선 한달에 $1000 이상을 구제비로 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에게 모든 소유를 팔아서 이웃에게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셨다. [ 19:21] 콘스탄티 이전의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실행하지 않으면 크리스챤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 일에 신실하지 않은 자들은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 5:1~5]

주류 기독교인들은 고급 주택가, 아파트에 살면서 게토화된 달동네 등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원 봉사를 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실행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런 온건한 수준의 명령을 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예수님이 천국을 뒤로하고 우리 중 하나, 그 중에서도 왕이 아닌 노예의 모습으로 오셨듯이, 우리도 게토에 들어가서 그들과 하나되기를 요구하셨다. 콘스탄틴 이전의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 요구에 충실했다.

그러나 현대 주류 기독교도들에게 이는 너무 극단적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 보다 공자를(한국인들의 경우), 또는 아리스토델테스를(서구인들의 경우) 더 좋아한다. 물론 공공연히 이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자의 가르침 수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행 원칙 수준에서만 실행함으로써 예수의 제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 주류 그리스도인은 실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라기 보다는 공자의 제자이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우린 일요일마다 교회 모임마다 행해지는 예수님에 대한 립서비스를 그만 두어야 한다. , 우린 복음서에 쓰여진 예수님의 구체적인 실행 메시지를 뭉뚱그려 일반화하고 예수님이 명백하게 지시한 구체적인 실행의 가르침을 무시한다. 그러면서 온갖 종교적 수사와 언어로 스스로를 치장하며 거역의 죄를 숨기려 한다.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이다. [ 15:12]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 그 가르침의 의미는 더 소프트지는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이다. 좋은 출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구는 이 수준 너머에 있다. , 친구를 위해 그대 자신(육체, 자아)을 죽음에 넘기우는 자리까지 가기를 요구한다. [ 15:13] 주님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했듯이 우리가 서로에게 이 말씀을 실행할 것으로 기대하신다. [ 15:14]

예수님은 사랑이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 모호하고 추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라면 어떻게 사랑을 실행해야 할지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어떤 댓가를 치룬다 할지라도 이를 실행하는 해야 한다고 믿고 지금도 실행하고 있는 자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our-way-of-life-and-the-evaluation-of-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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