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소유에 대한 탐심을 꺽음으로 시작되는 하늘나라의 삶의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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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인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통제하기 쉬운 환경과 삶의 질서가 있다. 즉, 사적 재산에 대한 욕망 또는 그 정당성을 자발적으로 부인하는 공동체적 환경이다.

모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모기만 잡을 것이 아니라 먼저 웅덩이를 제거해야 한다. [딤전 6:6-10] 왜냐하면 웅덩이에서 새로운 모기들 계속해서 산출되기 때문이다. 이기적 욕망과 이기적 욕망이 야기하는 파괴적 악행을 없애려면 이기적 욕망의 동기이자 목적인 사적 재산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1]
죄와 싸우려 하지 말라. 아에 시선도 두지 말고 보지를 말아야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다. 그런데 죄의 욕구와 논쟁하려는 순간 죄의 영향력에 빨려 들어간다.
예수님이 부자 청년에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다. 그가 섬기는 맘몬을 부수는 길은 사유재산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 19:16~22] 그렇게 해야 참된 삶을 파괴하는 사유재산과 함께 사적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율법적 의라는 차원에서 완벽해 보였던 부자 청년은 완벽하고 의로와 보였다. 스스로 여기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사유 재산 포기의 요구는 받아 들일 수 없었다. 다른 종교적 요구는 사랑 없이 자기 부인 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자기를 위해서 자아 충족적으로 종교적, 윤리적 차원을 요구에 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위신과 부자 청년 육체적 삶만을 담보해 주었던 부자 청년만을 위해 봉사해온 사유 재산의 포기에 대한 요구는 이기적 소유와 번성의 욕망에 잡혀 있는 그의 중심을 보여 주었다. 자기 부인을 동반한 사랑 없이 자기 의와 자랑, 자신을 위해서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율법 실행의 내적 동기를 보여주었다.

당시 부자 청년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시대 제1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도 오로지 먼저 나 자신만을 위해 봉사하는 사유 재산은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게 큰 시험거리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이 땅에서 절대로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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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Strict Biblicism: The Hutterites, however, in their strict Biblicism, became extremely sensitive and alert to the pitfalls of “mammon” in all its form.
“As the beetle lives in the dung. And the worm in the wood, so avarice (or greed) has its dwelling place in private property.” (1599) Whosoever refuses communal living, they taught, shows obvious sympathy for avarice (or greed).
And then they quote the example of the rich young man in the parable who could not enter the Kingdom of God because he was not willing to sell all that he had and give it to the poor. [마태 19:16~22]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23-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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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터라이트! 이들은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뛰어 넘었다. 500년 가까히 서로 사랑하는 말씀을 Community of Goods을 실천하는 수준까지 적용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에게 만이 아니라 서로에게 위탁되고 헌신된 삶을 방식, 존재 양식을 선택했다.
진정 사랑하는 남녀가 부부가 자기 것에 대한 구별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마찬 가지로 이들은 예수의 사랑에 의지해 형제 자매를 진정 사랑함으로 형제에 대해서 재산권을 주장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생겨남으로 완전히 새로운 사회가 인류사회에 다시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 가능한 내적 토대 확보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자가 되는 길[1]이라고 가르치고 배우고 따랐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기독교 공산사회가 또는 Community of Goods이 탄생된다.

생존에 대한 두려움에 압도 당해 먹히지 않은 자들이다. 그래서 자기 죽음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의 길을 열은 그리스도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자들이다. 이런식으로 사랑을 선택한 자들만이 이 천국의 문 안으로 들어가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쫓아야 한다. 그 시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염려와 자기 돌봄을 포기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나만을 위한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를 포기한 바로미터는 사유재산의 포기이다.
다른 크리스챤, 심지어 다른 Anabaptist들이 기독교 공산사회를 산출하는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적인 삶과 ��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하고 날마다의 자기에게 부여된 십자가를 지는 데까지 헌신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사랑을 모르는 인간의 삶의 욕망 자체가 재앙의 씨앗이다. 자신 만을 위한 삶의 욕망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아를 죽음에 던져서 친구를 위한 사랑을 실천함 [요 15:13] 으로 사적인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한다. 그 결과 제자가 되는 길에 들어서고, 이들의 교제가 발전해서 기독교 공산사회가 된다.
진정한 Gelassenheit가 있으면 욕망의 포기가 있다. [2] 진정한 욕망의 포기는 사유재산 포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물질 공동 소유의 공동체, 공산 사회로 이끈다.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또는 지식이 공산사회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죽음을 통한 사랑의 헌신이 Community of Goods을 창출한 것이다.
무신론적 국가 공산주의가 실패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을 포기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내적 마성에 대한 두려움] 오히려 국가 공산주의는 삶과 소유와 번성의 욕망의 에너지를 이용해서 생겨난 공산주의이기 때문에 자기 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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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tterite Studies p84: Elsewhere we read, “If you want to become a disciple you must resign to such a Gelassenheit and must renounce all private property.”
At this place it might be good to stress that this attitude leads to the establishment of complete community of goods, while other Anabaptist groups, likewise intent on practicing love, were satisfied with a “community of charity,” a caring for the needy without the demand of giving up private property altogether. Such a community of charity was typical among the Swiss and Dutch Bretheren.
[2] Hutterite Studies p84: Avarice, the demon of possession, must therefore be overcome if true Gelassenheit is to be achieved. But once it has been overcome, there follows complete community of goods in brotherly togetherness and sharing.

# Galassenheit is a German word that doesn’t have a direct English translation. The best definition I could find was in the book Amish Grace: How Forgiveness Transcended Tragedy - Kraybill, Nolt, and Weaver-Zerche. The authors define galassenheit as the attitude of yieldedness or submission to the will of God. It is lived out through yielding to one another, renouncing self defence and giving up the desire for justification or efforts at revenge.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883-ENG
[Msg552] &11/1/2011 7:22:54
예수님을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명백하다. 현재의 삶의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으라는 것이다.

여기에 온건주의자인 자칭 그리스도인과 예수님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 스스로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믿고 주장하는 주류 기독교인들은 온건주의자들다. 그래서 주류 기독교인들은 삶의 방식을 지키고자 충격적일 수 밖에 없었던 예수님의 핵심 메시지를 적당한 마사지를 거쳐서 전달되게 만들거나, 의도적으로 다수의 인식에서 배제시켜왔다.
주류 기독교인의 기준에 의하면 예수님은 명백히 극단주의자다. 예수님은 적당한 체면치례만으로 넘어가려는 대다수의 바램을 간단히 밟아 버리셨다. [마 19:18~22] 예수님은 현재 우리의 삶의 기반을 부셔 버리고 새로운 기초 위에 다시 세울 것을 요구하신다. 즉, 다시 태어나는 수준의 변화가 아니면 그의 나라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셨다.
주류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우린 오직 온건한 방식, 충격적이지 않은 방식의 변화만 받아들일 수 있고, 필요할 뿐이다. 그렇다! 주류 기독교도의 대변인인 칼빈의 주장대로 우린 완벽하지 않다. 맞다 우린 모두 죄인일 뿐이다. 그래서 우린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사랑의 화신인 하나님은 우리 용서하실 것이다! 얼마나 사악한 논리인가? 그들은 예수님 화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분은 단지 과장법의 대가였을 뿐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해서 우린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적절히 튜닝하고 양심의 저항을 무력화 시켰다. 예를 들어 이런식이다.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절하라!”, “매달 구제비로 $1000 정도를 지불하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자원 봉사에 참여하라!” 대충 이 정도 수준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고 지키면서 스스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규정하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수준 이상의 것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노예가 되라고 하셨다. 선한 사마리안인처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도 되지 못한다고 하셨다. [눅 10:36] 그런데 어떻게 가까운 사람들에게 친절한 정도의 사랑의 실천만으로 제자가 될 수 있겠는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친절은 죄인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도 더 잘 실행을 한다. [마 5:47]
주류 기독교도들 사이에선 한달에 $1000 이상을 구제비로 쓴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여기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에게 모든 소유를 팔아서 이웃에게 나누어 줄 것을 요구하셨다. [마 19:21] 콘스탄티 이전의 초대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이 명령을 실행하지 않으면 크리스챤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 일에 신실하지 않은 자들은 저주를 받아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다. [행 5:1~5]
주류 기독교인들은 고급 주택가, 아파트에 살면서 게토화된 달동네 등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원 봉사를 하는 것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실행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런 온건한 수준의 명령을 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예수님이 천국을 뒤로하고 우리 중 하나, 그 중에서도 왕이 아닌 노예의 모습으로 오셨듯이, 우리도 게토에 들어가서 그들과 하나되기를 요구하셨다. 콘스탄틴 이전의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이 요구에 충실했다.
그러나 현대 주류 기독교도들에게 이는 너무 극단적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예수님 보다 공자를(한국인들의 경우), 또는 아리스토델테스를(서구인들의 경우) 더 좋아한다. 물론 공공연히 이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자의 가르침 수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행 원칙 수준에서만 실행함으로써 예수의 제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즉, 주류 그리스도인은 실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라기 보다는 공자의 제자이거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이다.
우린 일요일마다 교회 모임마다 행해지는 예수님에 대한 립서비스를 그만 두어야 한다. 즉, 우린 복음서에 쓰여진 예수님의 구체적인 실행 메시지를 뭉뚱그려 일반화하고 예수님이 명백하게 지시한 구체적인 실행의 가르침을 무시한다. 그러면서 온갖 종교적 수사와 언어로 스스로를 치장하며 거역의 죄를 숨기려 한다.

그분의 가르침의 핵심은 사랑이다. [요 15:12] 우리들 대부분에게 있어 그 가르침의 의미는 더 소프트지는 것이며, 다른 이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이다. 좋은 출발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구는 이 수준 너머에 있다. 즉, 친구를 위해 그대 자신(육체, 자아)을 죽음에 넘기우는 자리까지 가기를 요구한다. [요 15:13] 주님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했듯이 우리가 서로에게 이 말씀을 실행할 것으로 기대하신다. [요 15:14]
예수님은 사랑이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즉, 모호하고 추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라면 어떻게 사랑을 실행해야 할지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이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어떤 댓가를 치룬다 할지라도 이를 실행하는 해야 한다고 믿고 지금도 실행하고 있는 자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our-way-of-life-and-the-evaluation-of-jesus
[Msg805] &6/16/2013 11:56:53 AM
모든 체제는 그 체제를 뒷 받침해주는 인간의 내적 기초가 있기 마련이다. 농업, 식당업 등이 가능한 것은 인간이 항상 배고프기 때문이다. 의상 디자인, 미술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미에 대한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자본의 지배가 확립된 이유는 무엇일가? 거의 모든 인간이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수의 사람들이 1 억만 주면 가족도 버릴 수 있다는 설문 조사 보고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돈이 지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돈의 지배한 체제가 완성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돈을 더 사랑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이 돈을 더 사랑했다. 그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고, 그들의 힘이 강화되어 도시를 중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종속시키자, 사람들이 그리로 더 몰려 들었다. 일단 돈이 지배하는 체제 안에 들어가면 거의 사람들은 결국 돈을 가장 사랑하는 가치 체제에 점령을 당한다.
돈은 사람들을 사람들을 통제하고 지배할 힘을 준다. 그 힘을 인식한 소수의 병든 영혼들(사이코패스, 마키아밸리스트)은 돈의 힘을 획득하기 위해서 병적으로 돈을 추구한다. 보다 독하고 강한 동기를 가진 이들이 결국 자본을 축적하고 시장을 지배하고, 이익을 독점한다. 이들이 시장을 통제하고 결국 건강한 시장기능을 마비시키면 통한 돈을 통한 병든 자들의 지배가 시작된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지배를 받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소극적으로 무자비한 사람에게 지배받지 않기 위해서 다수의 사람들은 돈을 추종한다. 이러한 돈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시장을 이미 조종하고 있는 소수에게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할 기회를 만들어 준다. 대중은 빚의 노예, 곧 돈의 노예가 된다.
시스템 위에서 이 모든 것을 강제하는 소수의 사람은 생존과 자유가 아니라 사람들을 빚으로 지배하고 노예로 만들기 위해서도 그래서 세상을 차압하기 위해 돈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자기를 위한 돈을 축적해서 스스로 자기만 구원하려는 세속 구원론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먼저 하느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도리, 인간 구원 길로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에 충실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현 시대, 곧 현 세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돈의 지배를 경험해야 돈이 지배하지 않는 공동체적 체제의 가치를 깊이 인식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어쩌면 돈의 지배 하에서 고생하는 탕자의 경험이 대다수 인간에 필요한 지도 모른다. 그래야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돌아온 탕자를 위한 것이지, 아직 돈에 중독되어 취해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하지 않다. 돈독을 이해하고 그 것 때문에 자기가 죽어가고 있음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가 된 사람들일 지도 모른다.
사무엘상 8 장의 얘기는 이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이 왕의 질서를 받아 들인 이유도 동일하다.
사무엘상 8장의 자유인들은 스스로 자유를 포기했다. 자주성과 주체성을 포기하고 노예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스스로 왕에게 종속되어 왕에게 힘을 몰아줌으로써 이들도 다른 나라들처럼 강력한 왕의 덕을 봐서 노예들을 더 부리고 싶어 했다.
[삼상 8:20] 돈으로 지배하고 군림하고 싶기 때문에 돈에 힘에 마음이 굴복당해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된 것이다. 부유한 노예가 가난한 자유인보다 좋은 것이다.
사람들이 교만한 생각을 버려야 돈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 있다. 돈이 얘기하는 유토피아가 거짓임 알아야 돈의 지배가 끝날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의 기초는 교만과 거기서 나온 지배욕, 허영심 때문이지 않을까?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basis-that-allowed-money-to-rule
[Msg507] &6/28/2011 8:25:11 AM
후터라이트 친구들을 만나면 특이한 점이 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와 달리 그들은 그들은 진리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경말씀에 명명백백하게 나온 진리라 하더라도 우리는 에고의 자존심 때문에 거부한다. 또는 대담하게도 상황논리를 갖다대고, 현실론을 들이댄다.
그들 후터라이트, 아미쉬의 표현대로 우리의 마음은 High Mind이다. 우리의 마음이 너무 높은 것이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가 물었다고 한다. 예수님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우리 중 다수는 빌라도와 같아서 왜 빌라도가 잘못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빌라도와 같이 마음이 높은 자들이다. 우리의 에고로 진리를 판단하려 한다.
세속에 찌든 우린 진리에 대해서 정직하지 않다. 빌라도처럼 자아를 동원해서 진리를 분별하고 판단 선택할 수 있다고 본다. 이 시대는 인간 에고 지배의 시대이고 소위 크리스챤이라는 사람들도 자기 배를 신으로 삼는 것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는 시대이다. [빌 3:19, 롬 16:18] 그러니 어떻게 진리에 정직하게 반응하겠는가?
모든 사람이 진리를 통해서 자유로워 지는 것은 아니다. 돼지와 개에게 안된다. 오히려 진리를 전한 사람도 위험에 빠뜨리고 자기들도 더 큰 죄를 짓는다. 이들은 결코 진리를 진리로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 상당수가 이 분류에 들어갈 것으로 믿는다.
마음에 간사가 없이[요 1:47, 시 32:2]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는 정직한 길을 찾아야 할 이유가 있다. 
빌라도와 대응되는 자가 백부장이다. 둘다 같은 이방인이다. 각각 이방인의 나쁜 모델과 좋은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
빌라도는 그리스 철학의 전통을 따라 이성으로, 인간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재단하려 했다. 에고의 왕좌는 굳걷하다. 그들��게 있어서 진리를 에고의 오만함을 만족시켜주는 치장품이 될 뿐이다.
백부장은 진리에 순복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진리는 분석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닥치고 듣고 복종해야 하는 절대적 권위의 진실이었다.
예수님은 마음에 간사가 없는자가 참 이스라엘이라고 하셨다. [요 1:47] 주님은 복잡한 마음과 높은 지적 능력을 가진 바리새인 니고데모를 제자로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단번에 주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직관적으로 알아볼 수 있었고 그에 따라 즉각적으로 순종할 수 있었던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은 순수한 사람들을 제자들로 받아들였다.
진리의 진리됨을 볼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에고에, 이성에 있지 않는 것 같다. 그 이해는 성령이 주시는 선물, 곧 직관적 영감에 의해서 온다고 여겨진다. [고전 2:4]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러한 직관적 이해와 즉각적 순종은 에고를 버리고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임하는 신적인 능력이다.
하급 직업 군인이며 순결하고 단순한 백부장은 투명한 눈으로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한 옳바른 태도, 곧 최고의 믿음을 보여 주었다. 곧, 즉각적으로 알아보고, 닥치고 순종하는 것이다.
즉, 그는 진리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했다. 그것이 진리를 통해 자유를 얻는 구원의 길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being-honest-about-the-truth
[Msg993] &1007071533a

다수가 자기부인의 길을 갈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자기부인의 길을 가야 새로 세워진 나라에 불평등과 죄가 없다. 불행히도 다수는 절대로 자기 부인의 길을 가지 않는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지 않는다. 자기 부인을 거절하는 자들까지 받아들이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의 법을 어그러 뜨린 다면 거기는 더 이상 하느님의 왕국이 아니다.
하느님의 왕국을 위해서는 본질적 원칙을 타협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원칙을 고수하면 오직 소수만이 선택해서 들어올 수 밖에 없다. 다수를 위한 길이라면 자기 희생에 기반한 사랑이라는 하늘 나라의 법을 포기해야 한다. 그러나 이 법을 포기하면 거기는 하늘 나라가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왕국은 오직 이 법을 실행할 수 있는 소수만을 위한 길이다. 나머지는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본 냉혹한 현실 인식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다는 것은 결국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길을 가기로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의 표현으로 소수만 선택하는 좁은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류가 되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 않을까?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why-do-only-few-choose-to-follow-the-way-of-the-christ
[Msg321] &091021.2305:
엔진과 연료를 바꾸어야 진정한 혁신이다. 엔진과 연료를 그대로 둔채 나머지를 바꾸는 것은 개선이다.
개선으로 넘을 수 없는 한계는 있다. 그 때는 엔진과 연료를 바꾸는 혁신이 필요할 때이다.
내연기관 기반의 프로패날을 가지고 있는 비행기로 음속을 돌파할 수 없다. 제트 엔진이 나와야 한다.
말이 끄는 마차를 아무리 개선해 봤자 교통혁명을 기대할 수 없다.
사람을 아무리 개선하고 변형시켜 봤자. 그 사람의 중심, Core, 엔진을 바꾸지 않고서는 그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자아 중심적인 사람이 아무리 습관과, 종교와, 매너를 바꾸다 하더라도 모든 것은 자아로부터 나와서 자아를 통해서, 자아를 의지하고, 자아를 위해서이다.
사람의 자기 중심적, 육신적인 욕망에 의해서 발동이 걸리는 옛 아담의 생명이 먼저 죽어야 한다. 옛 생명이 심겨진 바닥에서 새 자아 곧 새 생명이 자라 옛 자아를 대체함으로써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다.
사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생명으로 대체된 사람만이 근본적 혁신을 위해 준비된 사람이다.
사랑으로부터 나와서 사랑을 통해서 사랑을 힘 입어 사랑을 위한 생각, 결정, 행동, 습관, 생활 방식, 삶의 양식, 존재 방식, 천국을 세워 나가는 것만이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중심, 아담의 생명에 변화를 줄 것인가?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Msg321-ENG
[Msg551] &10/21/2011 11:33:56 AM
후터라이트는 간증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500년 가까이 무소유 공동체를 이어 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길은 쉽지 않았다. 500여년전 약 5만명이었던 사람들이 한때 15명으로 줄어들 정도의 대학살도 경험했었다. 소수의 남은 사람들의 겨우 다시 공동체를 시작했을 무렴에 전쟁터 한가운데 던져지기도 했었다. 삶의 터전이 전쟁터가 되었을 때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서 아무도 살아보지 않았고 개척되지 않은 땅으로 들어가서 기아에 허덕이기도 했다.

수많은 그들의 얘기에도 불구하고 그들 스스로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서, 실행에 대해서, 삶에 대한 얘기를 알려주기 위해 외부 세계에 향해서 위해 펜을 든 후터라이트를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오히려 외부세계는 후터라이트에 대해 관심이 많고, 너도 나도 후터라이트의 정체와 믿음, 실행에 대해서 떠든다. 최근들어 많은 사회공학자들, 신학자들, 공동체 운동가들 등등이 저 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이들에게 왔었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후터라이트 또는 아미쉬와 같은 아나뱁티스트 공동체를 살펴보고 논문을 내고, 책을 발간한다.
그들이 후터라이트에 관심을 보이는 부분적인 이유는 그들의 위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후기 기독교 사회에 접어든 서구 사회는 그들의 과거의 가치와 실행에 대한 믿음을 잃어가고 있다. 주류 기독교 사회는 서서히 움추려 들고 있다.
번잡스러운 새삼스러운 관심에 내가 아는 후터라이트는 시쿤둥하다. 그 이유를 ���어 보았다. 떠들고 관심만 보이지, 실재로 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사랑과 순종이 없고 그 결과 삶이 없다면 그렇게 볼 수 밖에 없다.
제임스 밸리 콜로니의 문은 외부 세계 방문자에 대해서 연지 이미 20년여년이 되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 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아직 후터라이트들이 했던 것처럼 “서로의 필요를 위해 드려진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한다. 즉, 말은 많은데 “사랑”이 없는 것이다.

그들의 눈에 후터라이트와 아나뱁티스트에 관련된 수많은 논문과 책과 학술회의는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처럼 보이는 것 같다. [고전 13:1]
그들에게서 종교적 위선자들에 대한 피곤함을 자주 발견한다. 자기를 죽음에 넘김으로 그리스도의 명령을 철저하게 순종하기를 원치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증거하고, 기독교 신학과 교리에 대해서 논쟁하 것만으로 자족하고 자긍하는 종교쟁이들에 대한 거부감 있다. [마 7:26]
그들은 그들의 순종의 삶을 통해서 얘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들 사이의 친밀하고 헌신적인 관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전달되기를 원한다. 그래서도 그들은 먼저 침묵의 노동을 통해서, 공동체의 존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현실성과 진실을 증거 하려 하지 함부로 자기 소리를 높이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펜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삶의 증거를 통해서 외치는 그들 영혼의 외침의 존재를 증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와서 보고 그들의 삶의 헌신이 얘기하는 바를 주의 깊게 보고 영혼의 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불러 오려면, 누군 가는 메신저가 되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English Text: http://jungwonyang.com/post/the-document-of-hutterites